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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Nov 05. 2022

유년으로의 초대

사진 속의 어린 나와 대화하기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바다."


1초의 망설임 없이 직관적으로 나오는 대답에 놀란다. '뭐 먹을래?'라는 질문에 '아무거나.'를 외치는 우유부단한 나의 모습과 달리 이토록이나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오래된 사진첩에는 늘 바다가 있다. 나의 평생, 모든 여름은 바다와 함께 시작하고 끝났으니까. 하나의 사진에 눈이 머물렀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사진 속 어린이가 말을 건다. 어렴풋이 느낌만 갖고 있던 빛바랜 사진이 조금씩 움직이며 살아난다. 아이가 말하는 것 같다.

'오랜 시간 와주길 기다렸어. '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바다로 초대받았다. 1986년. 사진 속 아이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환히 웃으며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왜 이제야 왔냐고?

그러게. 너무 늦어서 미안해.

뭐 하고 있었어?'


'나는 모래성을 쌓고 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집을 만들었는데, 꾸미려면 조개껍데기가 필요해서 곧 있으면 찾으러 갈 거야. 아줌마도 같이 갈래?'


'좋아. 나는 하얀 조개껍데기를 찾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던데.'


'어머! 어쩜! 응. 나도 그래. 깨끗이 닦아 맨질맨질해진 흰 조개껍데기는 꼭 보석 같기도 하고 밥공기 같기도 해.'


'밥공기?'


'응. 나는 거기다 모래로 밥을 퍼서 담아. 그리고 갈매기가 지나가면 먹으라고 줄 지어 세워두곤 했어.'


'아고. 이뻐라. 그런 마음이 참 기특하구나.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으면 얼굴이 시커멓게 탔네.'


'엄마가 선크림을 잔뜩 발라주었는데 나는 금방 까매져. 저기 ~저 아이는 내 동생인데, 걔는 파도가 무섭다고 난리야. '


'파도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어려서 겁이 많나 보구나.'


'응. 아빠, 나, 동생 이렇게 셋이 손을 잡고 서서 파도가 오면 펄쩍 뛰어넘는 놀이를 하는데, 동생은 언제 파도가 오나 걱정이 돼서 뒤를 돌아보느라고 놀이를 하지를 못하고 있네.'


'하하하하!

어쩜. 아줌마 아들도 그랬었는데.

파도와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너는? 파도가 무섭지 않아?'


'응. 나는 파도가 좋아.

세차게 달려와서 발 앞에서 부스러지며 내는 거품이 좋아. 발을 씻어주는 것 같은데, 파도는 순 거짓말 쟁이기도 해. 발에 모래가 더 덕지덕지 붙어 있거든. 발가락 사이사이마다. 히히."


'정말 그러네. 아줌마도 파도가 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꼭 내 몸이 쓸려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받는 그 시간이 참 좋아.'


'아줌마, 아줌마랑 함께 여기서 이렇게 노니까 좋다. 우리 동그란 성을 만들고 거기에 바닷물을 넣어 연못도 만들자. 응?'


'그래! 그러자.

너... 꿈이라는 말 알아?'


'응. 알아.'


'잠잘 때 꾸는 꿈 말고, 무언가 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꿈 말이야.'


'응. 알아. 나 커서 뭐 되고 싶냐고?'


'응.'


'아줌마가 그게 왜 궁금해?'


'이렇게 예쁘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네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아줌마가 정~말 궁금해서, 그 꿈 꼭 이루라고 마법의 모래가루를 좀 뿌려주고 갈까 해서 그랬지.'


'유후! 그 마법의 모래 가루 뿌리면 진짜 효과가 있는 거야?"


'그럼! 믿어봐. 이 아줌마 한번.'


'음.... 나는 말이야....

나중에 나중에 다 커서도, 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기 이렇게 내가 서 있었다고.

환히 웃었다고.

행복했었다고.

뜨거운 햇빛이 좋고, 적당히 데워진 바닷속도 좋고, 발에 붙은 모래도 좋고, 수집한 예쁜 조개껍데기도 좋다고.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희미해져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게 아줌마, 내가 지금 바라는 거야.


오잉? 근데 아줌마 왜 울어?

내가 슬픈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아고. 아줌마가 주책이다. 네 말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어. 그래. 너는 그렇게 온 마음으로 그 시절을 살았구나. 너의 유년의 땅은 참 단단했었네.


혹시, 살다가 그 땅이 흔들려도 지금 이 마음을 잊지 마렴. 아줌마가 그렇게 빌어줄게.'


'아줌마, 이제 가야 해?'


'응. 아줌마도 이제 아줌마 아이들이 기다리니 가볼게. 오늘 만나서 정말 기뻤어. 사랑스럽고 예쁜 너의 모습을 또렷이 담아갈게.'


ㅡㅡㅡㅡ


1986년부터 나를 기다려온 어린 여자아이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희미해져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바다라는 곳에 가면 나는 늘 그 여자아이가 되곤 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만나고 싶지만 너무 희미해져 버린 그 여자아이가 그리워서, 나는 파도를 뛰고 손 사이로 발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고기를 잡는 시늉을 하고 모래성을 쌓고 예쁜 조개를 주으러 다녔나 보다. 가만히 누워 바다를 응시하기보다 바닷속에서 바다 밖에서 내 안의 어린 소녀를 찾아 움직이고 또 움직였었다.


이 순간이 꿈처럼 희미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오늘을 받아 적는다. 이것은 그 시절 여섯 살 여자아이의 꿈. 나는 기꺼이 그녀의 꿈을 이루어준다.


여섯 살 나야, 기다려줘서 고마워.

마흔두 살 아줌마가.

사진 속 유년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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