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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Nov 10. 2022

피 냄새 가득한 고요함 속, 우리는 만났다

너를 처음 만난 날


기억이 아득하게 멀어져 뿌옇게만 보일까 봐 두렵다. 지금 마음 가득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모습들이 언젠가 흐릿해져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난다. 오로지 너와 내가 느꼈던 그 끈끈한 생의 순간을, 너와 내가 가장 처음 만났던 그날을 기록하여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어떤 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니까.


나는 네가 참 궁금했다. 내가 만나게 될 네가 어떤 사람일까 기다리던 시간들은 설레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의 살은 보기 흉하게 썩어 문 들어졌고 옷을 입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흉하게 살갗이 벗겨지고 진물이 흘렀다. 항문으로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치질이 튀어나왔는데 몸속에 들어있어야 할 장기가 몸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곳은 참으로 건조했고 쓰라렸다. 원래 위치로 돌려놓기 위하여 매번 나는 나의 손을 집어넣어 꾹꾹 누르곤 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면 좀 나을까 싶었고, 치질 수술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너를 만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겠지 하며 의지를 다졌다. 나는 너의 발길질을 느꼈고 불쑥불쑥 느껴지는 움직임이 사랑스러웠다. 가만히 배에 손을 얹고 이야기를 하면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움직임이 평온해졌고, 내가 잠을 잘 즈음되면 신나게 뛰노는지 활발해지곤 했다. 그 움직임은 동글동글하고 부드럽게 활기찼다.


너는 그렇게 태초부터 둥근 마음을 가진 활기찬 아이였다. 나는 너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옴을 느꼈고, 진통이 시작되었으며, 네가 새로운 세상을 위해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든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진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을 작은 너의 안간힘을 생각하며 나는 진통을 견뎠다.


너를 만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옴을 느낀다. 강도가 세어지는 진통에 아찔해지는 정신을 견디며 나는 곧 보게 될 너를 생각한다. 그리고, 너는 내게 신호를 보내주었다.

'지금이에요. 힘을 주세요. 제가 그 힘을 받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게요.'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너,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네가 가장 힘들게 애를 쓰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네가 보내주는 그 본능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힘주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한 협력이었고, 우리는 정말 멋진 팀이었다.


단번에 미끄러지듯 나온 네 누나와는 달리, 나의 다리 사이에 머리가 걸렸다. 네 머리가 걸린 순간, 살이 찢어진 것 같았다. 파 바 바박. 자연스럽게 터져버린 살은 여기저기로 파편 튀기듯 찢어진 느낌을 주었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바랐다.

'아가, 어서 나오렴. 숨 쉬기 힘들지?'

계속 거기 끼어있으면 네가 얼마나 힘들까 싶은 마음에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낸다. 얼굴에 터지는 실핏줄처럼,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 다리 사이에서 옆으로 앞뒤로 가차 없이 찢어져 나가는 살점들 사이에서, 너의 동그란 머리가 빠져나왔다. 좌르륵. 흐르는 무언가와 함께. 그것이 피인지 물인지 알 길 없는 나는 그저 너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안도한다.

'응애~'


방금까지도 나와 함께 생활하던 너는 이제 오롯이 네가 된다. 안간힘을 질러대며 우는 너를 나의 가슴 안에 안아본다. 작고 따뜻하다. 믿을 수 없는 고통 끝의 얼얼한 나의 다리 사이는 감각이 없다.

'판이야.'

태명을 부르니 별안간 너는 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안긴 채, 너는 너는 찌그린 채 눈을 뜨고 싶어 꿈틀거렸다.

'판이야, 엄마야. 보고 싶었어. 엄마한테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해. 엄마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단다.'

너는 가만히 아주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아마 너의 눈은 아직 내가 보이지 않았겠지만, 분명 너는 내 목소리를 향해 왔다. 너는 너이지만, 우리는 아직 연결되어 있다. 나의 냄새와 목소리를 너는 기억했다. 그렇게 피 냄새가 밴 공기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우리의 첫 만남, 네가 세상에서 들었던 가장 첫 한마디는 '판이야, 엄마가 보고 싶었어.' 였음을. 그리고 너를 처음 안고 만난 고요한 연결이 아직까지도 내게 너무나 생생함을. 나는 네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너는 그리 귀한 존재였음을,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존재였음을.


그렇게 귀한 네가 받을 앞으로의 치료를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첫 순간을 오기 위해 네가 쥐어짜 내던 그 안간힘,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고통 끝에 너와 나는 만났음을. 몸속의 핏줄이 폭죽처럼 터지며, 끝끝내 두 다리 사이의 살이 폭탄처럼 찢어질 때, 피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이 콸콸 쏟아지며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네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안다.


믿을 수 없는 고통이 동반한 분만의 순간에도 너는 나를 이끌어주었음을, 그렇게 나는 이번에도 너를 믿으며 한발 한발 알 수 없는 세계 안에서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들을 좇아 걸어갈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네가 이 세상에 와주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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