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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Dec 09. 2022

사내아이들의 우정

내게는 신기한 그들의 세계  ​


공 하나만 있으면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끼리도 금세 친구가 되어 땀을 나누며 놀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참으로 신기했다. 꾀죄죄하게 흐르는 뗏 국물을 닦으며 함께 하는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 깊숙한 곳이 울렁였다.

'이런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구나.'

남자아이들의 우정은 이러한가 보구나.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안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둘째 아이로 인해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산다.


같은 어린이집 친구들끼리, 같은 유치원 소속들끼리. 알게 모르게 형성되는 카르텔 안에서 나의 첫째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기가 어려웠다. 첫째는 딸이다. 놀이터에서 이미 놀고 있는 그룹 안에 들어가기 위해 그녀가 겪었던 숱한 시행착오를 보아와서 안다. 공 하나가 있으면 모두가 한 마음으로 놀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쌓아 올려진 카르텔, 가장 첫 관문은 이 질문들에서 통과하는 것이다.

"너 쟤 알아?"

"쟨 뭐야?"

"야, 우리는 친구거든."

그리고, 결국,  '같이 놀자.'라는 아이의 말은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려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함께 등교가 하고 싶어 같이 가자는 딸아이를 기존 형성된 그룹의 아이들이 이미 저만치 전속력으로 뛰어 피하고, 함께 가고 싶은 마음에 계속 뛰어가는 뒤쳐진 딸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첫째에게 '친구들이 장난을 하나 보구나, 그냥 우리는 따로 가는 게 어때?' 하고 설득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가 카르텔 쳐진 그룹 안에 들어가고 싶어, 보이는 모든 노력들이 어미의 눈에는 눈물겨웠고, 이 또한 아이가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아이만의 세계이기에, 그 모습을 보면서도 보지 못한 척,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믿어주며 응원해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꼭 그룹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해. '

이 말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기보다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픈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주문과도 같았다.


"와! 고올~~~~!!"

"잘했어."

"괜찮아. 괜찮아. 재밌으면 되었어."

"그래, 다음번엔 우리 골."

"야, 나도 좀 하자."

"형, 형이 심판 봐. 이따 팀 다시 나누자. 지금 이미 나눴거든."

"좋아. 내가 해설, 심판할게. 바로 해."

"야야, 이건 드로잉 파울이라고."

"어? 거기 미끄러우니 조심해."

"아씨. 아깝다."

열두 명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둘째는 일곱 살 아들이다. 오늘 놀이터에서 아홉 살 준서형과 둘이 시작한 공놀이가 어느덧 12명으로 불었다. 한 명 두 명 아이들이 몰려온다.

"야, 나도 좀 뛰자."

 이 한마디면 된다. 그 누구도 우리 그룹이네 아니네, 쟤는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알아서 자기들끼리 팀을 정하고 한마음이 되고, 미끄러운 바닥을 챙겨주고, 팀의 수가 맞지 않으면 자청해서 심판이 되어준다. 땀을 흐르며 젖은 손바닥으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누군가 넘어지면 손을 잡아 일으켜준다. 넘어지는 순간, 늘 타임이 되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묻는다.

"괜찮아?"

넘어진 아이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골을 먹어도 괜찮고, 골을 넣어도 괜찮다.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열 살 지함이는 이 날, 골키퍼를 하다 골을 연속으로 세 골을 먹었다. 열두 살 형아들이 괜찮다 말하며 "나랑 바꿀래?" 한다. 그렇게 골키퍼는 바로 교체가 되었고,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다.


"야, 물 있냐?"

"나 있어. 형! 입 대고 마시면 안 돼. 알지?"

"응. 나 입 안 데고 되게 잘 마셔."

"나도 나도. 물 딱 한 모금만."


나는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학원 가방, 저만치에 버려둔 자전거 앞에 선 채, 눈물 나게 예쁜 이 모습을 혼자 보기 아깝다며 한없이 마음에 담는다. 나는 부러웠다. 내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을까?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본다. 친한 친구들이 있고 늘 사랑과 진심을 나누었지만, 분명 이런 결은 아니었다.

공 하나로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것, 2002년 월드컵 때 빨간 티셔츠를 입고 광화문 한복판에 서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얼싸않으며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희열의 순간이 생각날 뿐.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내게는 한 번의 경험이 아들내미에게는 매일의 놀이터였다. 다 놀고 나서 아들에게 묻는다.

'그래, 저 형아는 이름이 뭐야?"

'응. 나도 몰라.'

이러기 일쑤다. 그룹이 없어도 잘 놀 수 있는 열린 환경. 첫째가 딸이었고 내가 딸이었기에 내게는 이런 환경이 낯설었다. 남녀의 문제라 제한 짓고 싶지는 않지만, 나라는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테두리에서만큼은 이것은 남녀의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내아이들의 우정이 이런 것이구나. 이거 꽤나 괜찮다.'


오늘 싸우고 돌아서서 내일 다시 놀 수 있는 단순함과 함께 땀을 나누며 부상을 공유하는 기분은 이런 것이구나. 해는 이미 진지 오래이고, 아이들은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물었다.

"이모야~ 여섯 시 되면 말해주세요."

"이모야~ 우리 엄마한테 전화 좀 해주세요. 딱 십 분만 더 놀고 들어간다고요."

때마침, 열두 살 형아가 힘껏 찬 공이 정통으로 키가 반 밖에 안 되는 일곱 살, 호의 왼쪽 얼굴을 가격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이 터진 호의 곁에 커다란 덩치의 형아들이 모여든다.

"호야, 괜찮아?"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형아들의 따스한 말을 들으며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그친다.


공을 정통으로 맞기도 하고, 시멘트 바닥에 슬라이딩하기도 하고, 슬리퍼 신고 나왔다가 너무 공이 차고 싶어서 맨발로 뛰기도 하고, 서로 물을 나누어마시고, 땀을 닦아주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함께 웃고 울고, 기적을 만들어 내는 아이들.

스포츠를 바라만 보아도 감동인데, 그것이 매일의 놀이가 되고 그렇게 내 친구, 네 친구가 정해지지 않은 채 매일 새로이 그날의 친구가 한데 모여 노는 세계. 내게는 너무나도 부러운 이상한 나라의 우정. 그것이 바로 사내아이들의 우정인가 보다.


물론, 마음이 편한 만큼 언제 어디서든 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 아들 엄마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치아만 안 깨지면 된 거라며 오늘도 선방했다고 외치며 부은 왼쪽 얼굴에 얼음팩을 대주며 외친다.

"오늘도 잘 놀았다."

그동안 쉬는 시간에 축구한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조기축구회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 자신이 놀이터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이토록 정성껏 할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며 피식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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