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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Dec 12. 2022

딸아, 삶이란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단다.

가족의 해외살이를 포기하며

"엄마, 우리 캐나다 안가?"

딸아이가 묻는다.

"응. 안가."

나는 작게 대답한다.

"아니야. 아닐 거야. 좀 늦더라도 갈 거지?"

딸아이가 다시 묻는다.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응. 나중에 언젠가 네가 스스로 갈 수 있을 거야. 반드시!"

나는 대답한다. 힘을 주어 마지막에 '반드시'라는 말을 추가한다.


대화를 하고 있자니 기억 언저리에서 나를 붙들던 기시감이 올라온다.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1990년대 중반, 중학교 시절의 나와 엄마의 대화였다. 당시,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인해 미국에 나가게 되어있었고, 가족 모두 함께 나가 있을 예정이었다. 내가 속했던 공립 중학교에는 각 반에 최소 열명 정도 외국에 나갔다 온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끼리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 깊숙이 영어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을 피어왔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닳고 닳도록 리와인드와 스탑, 플레이를 누르는 것뿐이었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모든 포스터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기뻤다.

'드디어, 나도 나간다.'

여기서는 쭈그리 소심이지만,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눈치 보느라 말 못 한다면, 그곳에서는 단지 내가 언어를 몰라 말을 못 한다 여길 것 같았다.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 주는 알 수 없는 도전감과 설렘이 말을 잃은 채 사는 소녀의 단조로운 삶에 생기를 주었다. 매일 아침 EBS 라디오를 녹음하여 따로 회화 연습까지 챙기며 내 나름대로는 준비라는 것을 하였다.


"한테 빌려. 쟤는 착해서 다 빌려줘."

"맞아. 걔가 거절하는 거 봤어?"

아픈 말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때마침 나는 나와 마음이 잘 맞던 친한 친구들과 전부 떨어져 새로운 반에서 새로이 친구를 찾아 속해야 했던 부담감이 컸고, 이 모든 것은 가족의 해외 살이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할아버지의 암이 심상치 않았다. 호전되는 것 같더니 점점 더 악화되었다.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큰고모, 작은 고모는 번갈아 할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집에 엄마가 계시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고, 직감적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드시구나.' 그리고, 뒤이어 알 수 있었다. '나가지 못하겠구나.'


"엄마, 우리 미국 안가?"

나는 물었다.

"응. 안가."

엄마는 작게 대답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좀 늦더라도 갈 거지?"

나는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응. 나중에 언젠가 네가 스스로 갈 수 있을 거야. 반드시!"

엄마는 대답했다. 힘을 주어 마지막에 '반드시'라는 말을 추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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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나는 작년 말부터 캐나다 일년살이를 준비했다. 계획대로라면 다가오는 2월에 나갈 예정이었다. 신랑은 지금껏 한 번도 어학연수를 받아 본 적이 없으며 출장을 제외하고는 해외살이의 경험이 없다. 그마저도 영어권 국가의 출장은 전무하다. 그런 신랑이 말했다.

"나도, 나가서 한번 제대로 언어를 공부해보고 싶어.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육아휴직을 그렇게 써 보고 싶어. 괜찮을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모님이 한 해 한 해 더 노쇠해지신다. 나가 있는 동안 부모님들께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한시라도 젊을 때 다녀오는 것이 맞지 않을까?  더 늙기 전에 도전하고 싶은 신랑의 마음이 간절히 전해졌다. 신랑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지역을 살폈다.


현실적으로 미국은 비자받기가 어려웠다. 캐나다 자녀 동반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몬트리올과 핼리팩스 두 지역이 어학원 연수만으로도 동반비자가 나와 후보지였으나, 운전을 못하는 나를 고려했을 때, 몬트리올이 적합한 도시로 생각되었다. 전적으로 신랑의 공부가 메인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석사를 한 내게는  ' 불어 또는 영어 어학연수를 위한 비자'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설레어 이 날만을 기다렸고, 아들은 새로운 곳은 두렵다며 안 가면 안 되냐는 말을 입에 단 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의 뇌출혈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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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언젠가 내가 스스로 갈 수 있어?"

딸아이가 불안한 듯 묻는다.

"그럼. 엄마도 그랬는걸?"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대답한다.

"엄마도?"

"응. 엄마도 외국에 나가는 줄 알았는데 못 나가게 된 적이 있어. 외증조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거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성인이 되어 갔단다. 기회는 언제든 찾아와.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

나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 실망감이 무엇인지 잘 안다. 딸아이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났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또한 잘 안다. 빈자리는 그리움이 가득 채울 테지. 나는 가지 못하는 그곳을 향한 그리움과 이미 그곳에 있는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인생임을. 계획한 것들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기에 더 살맛 나다는 사실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알아채는 것, 그것이 인생임을 아이는 배우는 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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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온갖 고생을 다 하신 채 세상을 떠나셨다. 후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가 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고이 접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장례식이 끝난 후의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난 후였을 것이다. 외롭고 슬픈 그 얼굴을.


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변수 앞에서 야무지게 플랜 a, b, c, d를 늘어놓지 못하니 차라리 내게 닥치는 일을 기꺼이 맞겠다며 닥치면 그때그때 헤쳐나가는 편이기도 하다.

올해, 캐나다행을 취소한다고 아이들에게 통보하고, 행정적인 준비를 중단했다. 딸아이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아이는 이해했다. 동생의 치료가 중요하고 지금이 아니어도 자신에게 기회는 많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향할 수만은 없다는 인생의 큰 진리를 배우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뜨끈해진다.

삶이란 이런 것이겠지. 포기하고 기다리고 그럼에도 꿈을 꾸는 것들. 이 모든 것이 소중해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다시금 배우면서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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