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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Jan 08. 2023

개꿈도 약에 쓰려면

화염과 화재경보기

하늘이 붉은 잿빛이다. 오후 4시다. 그러나 바깥은 공상과학 영화 속의 지구 멸망 직전처럼, 어둑어둑하다. 아이들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서 걸어와야 하는 딸아이가 오늘따라 좀 늦는다.

툭 툭 툭.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보니 비가 쏟아진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차에서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간다. 베란다를 바라보며 아이에게 전화를 해본다.

뚜뚜.

 전화벨만 울릴 뿐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빗물은 거센 강줄기처럼 금세 자동차 바퀴까지 올라온다. 그때, 하얀 소나타가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중앙선을 넘어 뱅그르르 돈다. 엇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맞은편에 오던 검정 suv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어어? 하는 사이 엄청난 소음이 들린다.

끼이이이이이이이 이 이 이 이 이 이이 이!

두 차는 머리를 맞댄 채 한데 엉켜 뱅글뱅글 돌며 끔찍한 소음을 내고 그 사이 머리 부분에서 번쩍 불이 옮겨 붙었다. 비는 내리는데 불이 옮겨 붙었다. 그제사 정신이 번쩍 든다.

119.

들고 있던 전화기의 손이 덜덜 떨린다. 힘겹게 긴급전화를 건다.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불은 점점 더 거세게 난다. 이내 곧, 화단까지 옮겨붙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섬광에 홀린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어 포효하는 불길을 바라본다.


"엄마, 우리 집은 불 안 나지?"

"그럼. 안나. 그러니 걱정 마."

"엄마, 불이 나면 나는 도망 나올 수 있지만, 집은 타잖아. 나는 그게 속상해. 집이 불쌍해."

여덟 살이 된 아들이 요 근래 내내 한 걱정이었다. 차에 붙은 불을 보며 아들 생각이 났다. 아들은 어딜 갔지? 눈앞의 화염 앞에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도로에서 화단으로 옮겨 붙은 불은 점점 더 거세게 유리창을 향해 다가온다. 일층의 우리 집 코 앞까지 불이 닿았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피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 아이들이 없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화염 앞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며 옷을 입는다. 일단 대피해야 해. 베란다 쪽 불이 유리창에 닿음과 동시에 현관문을 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엄마!"

첫째 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꿈이다. 빌어먹을 꿈. 무채색의 꿈에서 꼭 색이 있는 것은 피 아니면 불, 늘 붉은색만 색을 입혀 나온다. 옆을 보니 둘째 아이가 쌔근쌔근 자고 있다.


12월 30일 밤 9시, 저녁을 다 먹고 치운 후, 느지막이 퇴근한다는 연락을 받은 신랑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노닥이고 있었다.

애애애애앵!

화재경보는 예고에 없이 갑자기 울렸다.

쨍그랑!

사이렌 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는 들고 있던 머그컵을 떨어뜨렸다. 두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부엌으로 뛰어왔다. 경보가 곧 멈추겠지? 하는 마음과 달리 사이렌은 지속적으로 울렸다. 아이들에게 파카를 입으라 지시했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 그리고 나는 맨발에 파카차림으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눈 쌓인 놀이터 바닥 언저리 저편에 시뻘건 불빛이 번쩍였다. 웅성웅성하는 주민들 사이로 '저게 지금 불인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저만치 물러나있고, 장성한 청년 몇이 지하 주차장 근처에서 나는 번쩍이는 붉은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한참 후, 그들이 돌아왔다.

"뭐였어요?"

"아. 저건 소방차 사이렌 불빛이에요. 눈에 반사되어 그 사이렌이 불처럼 보여서 저도 놀랐네요. 다행히 오작동이랍니다."


지하주차장 소화전 동파로 물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고 그 바람에 엄청난 화재 경보가 울렸던 것이었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난 이 사건은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집을 잘 보던 첫째 아이는 혼자 집을 보는 동안 화재경보가 울릴까 두려워 집에 있기를 무서워했다. 둘째 아이는 시시때때로 우리 집에 불이 나면 어떡하나를 묻곤 했다.

"엄마, 불이 날까 봐 무서워."

아이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맴돌았다. 이제 좀 그만 무서워도 될 것 같은데, 아이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을 잘 때면 아이를 집어삼킬 듯 괴롭혔다. 그 걱정이 내게 옮겨 붙어 꿈으로 나왔나 보다. 생생했던 꿈 앞이다.

'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살게 해주는 꿈. 다급함과 간절함 앞에서 발이 얼어붙고 머리는 새하얗게 지워지는 충격이 여전히 생생하다. 만약 깨지 않고 계속 그 꿈을 꾸었다면, 나는 아이들을 만났을까? 우리 집은 화염 속에서 무사했을까?


따지고 보면 똥 꿈 아니던가? 폭우가 이토록 쏟아지는데 불이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옮겨 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의 엉터리 개연성을 미리 인지하지 못한 자신을 탓해본다. 그러면서도 나의 삶에 당연하던 많은 부분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감사하고 귀하게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퍼뜩 깨닫는다. 개꿈은 금 꿈이 되어 조용히 기억 어딘가에서 잊히겠지. 그리고 잊힐만하면 또다시  또 다른 개꿈이 약이 되어 내게 오겠지. 다음번엔 부디 좀 아름다운 형태의 꿈이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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