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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Jan 07. 2023

한 시절이 끝났다.

제대로 삐친 중년

결혼 13년 차가 되었다. 소파도 13년 차가 되었다.  13년 동안 그저 아이를 갖고 낳고 키웠을 뿐이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삭 삭아버린 나의 얼굴 마냥, 소파 역시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완벽하게 맛이 갔다. 쿠션은 꺼지고 가죽은 찢어졌으며 스펀지가 터졌다. 나무를 고정하는 철심은 튀어나왔다. 아늑한 소파는 아찔한 소파가 되었다. 완벽히 수명을 다한 소파를 교체하고자 식구들과 가구점에 들렀다.

예비 신랑, 예비 신부로 가구점을 볼 때와 달리,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가며 소파를 사는 일은 꽤나 도전이 필요한 일이었다. 알콩달콩 소꿉놀이 하듯 재미있던 신혼의 가구 쇼핑과는 달리, 두 아이를 대동한 가구 쇼핑은 가장 빠른 시간에 원하는 가구를 선택해야 하는 정확함과 스피드가 필요했다.

"언제 밥 먹어요?"

배가 고파 징징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스로 가구를 사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냥 집으로 향하기가 아쉬웠다. 이 근처에 온 김에 몰에 들러 조금 놀다 가면 어떨까? 아이들과 함께 쇼핑몰에 들렀다.


주말의 쇼핑몰은 상상이상으로 사람이 많았다. 다리가 아픈 아이들을 위해 앉아 쉴 카페를 찾았으나, 자리를 찾기가 엎어진 레고 더미 속에서 작은 구슬을 찾는 것처럼 힘들었다. 빼곡히 찬 카페의 테이블을 관찰하며 누군가 떠날 채비를 한다 하면, 부지런히 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갔다. 그럴 때면 늘 어디서 나타났는지 의뭉하게 갑자기 등장한 사람에 의해 자리를 빼앗기곤 했다. 어리둥절한 나의 눈을 본 젊은 그녀는 새침하게 말했다.

"여긴 제가 찜 해놓은 자리거든요?"

분명, 그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건만 그녀는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던 그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꼭 쥔 손을 한 아이를 토닥이며 다른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에는 허탕을 치지 않으리라. 매의 눈을 하고 주변을 살핀다. 두 자리가 곧 날 것 같다. 그들이 겉옷을 들기 시작할 때, 잽싸게 다가갔다. 그러자, 다른 방향에서 온 젊은 커플이 먼저 가방을 둔 다. 간 발의 차이다.

혼자였으면 참았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 때였으면 참았을 것이다. 아이와 함께 총 50분을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선 채, 시간을 허비한 터였다.  용기를 냈다.

"저희가 20분 정도 여기에 계속 서서 기다렸어요. 아이와 함께요."

그러자,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더 빨랐잖아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아..."

이것은 세대차이인가. 적어도 말이라도 예의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알고 있었다. 분명 우리가 그 자리를 기다리기 위해 저만치 서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분명 첫 번째 여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먼저 가방을 놓으며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자연스레 펼쳐냈다. 흡사, 육이오 전쟁을 겪으며 피난처로 떠나는 기차를 놓지 않기 위해 머리부터 밀어 넣었던 우리 할머니의 세대처럼,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도 무작정 먼저 밀고 들어오는 어르신들처럼, 싱싱한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그러했다.

주변을 둘러본다. 나를 살펴본다. 아이를 한 손에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가 벗어놓은 파카와 가방을 들어 피난민 같아 보이는 나의 모습.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을 때, 가끔씩 엄마가 급하게 가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생각했다.

"왜 아줌마들은 저렇게 급할까?"

아줌마가 되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표준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테이블이 빌 것 같다고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테이블의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테이블이 비었을 때 싸게 자리를 잡고 싶었다. 자리를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가 아니라,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자리를 갖는 상황이 당연했던 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새치기와 다름없는 행동을 하며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이들이 공연찮게도 모두 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그렇다. 나는 대놓고 젊은이들에게 삐져버렸다. 꼰대라고 불려도 상관없다. 기본적인 공공예의가 무엇인지 헷갈렸다. 문득 어디선가 본 박완서 님의 문구가 생각났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 (그 남자의 집, 79-80쪽)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는 기억은 억울함을 불렀다.  아이를 꼭 잡은 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써 감정을 누르며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이 오늘은 너무 많아서 시원한 음료를 못 사겠네. 대신, 동네에 가서 사줄게."

내가 들어설 공간이 확연히 줄었음을 확신하는 날, 왠지 이제는 소속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왠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구나 하는 것들에 대한 현실감이 밀려온다. 가장 예뻤을지 모를 시기에 가장 예쁜지도 모른 채 지나가버린 멀건 청춘이 안타까워 가슴이 저린다. 알 수 없는 것들에 쓸쓸함이 몰려온다.

'내가 아이만 없었어도 너보다 더 빨랐어. 그리고 있잖아. 이런 건 '새치기'라고 불러. 적어도 새치기를 할 거면, 예의를 지켜 말하는 게 어때?'

그 앞에서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을 가슴에 담아 걷는다. 내내 서 있던 다리가 무겁다.


" 가끔 젊은이들이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중략) 온 세상이 죄다 젊은이들만을 위한 '멍석'인 세상에서 노년의 내면은 제대로 주목받지도 이해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재현의 장에서 노인들은 눈과 입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산문, 132-133쪽


한 시절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나이. 한 시절이 끝났다는 것을 알겠다. 꼭 잡은 아이의 손을 만지작 거리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간들을.

집에 돌아오니 쪼글쪼글하다 푹 꺼지다 끝내 찢어져 삭은 소파가 나를 맞는다. 한 시절이 끝난 소파를 내다 버릴 날, 나는 무슨 마음이 들까? 이 소파와 함께 한 지난 13년은 이제 그리워할 뿐 다시 갈 수 없는 시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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