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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Jan 09. 2023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진 길

교욱 단상

[교육 단상]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진 길


서울대 교수회관으로 향하는 길, 차 안에서 아이들이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서울대라고 우리나라에서 좀 좋은 대학 중 하나야.”

잠시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운전을 하던 신랑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쫌이라는 표현을 해도 괜찮은 거야?”


비주류로 살아온 지 오래, 나는 원가족 내에서 사촌팔촌십촌을 통틀어 거의 유일한 비서울대 출신이다. 유학을 가서도 나만 유일하게 아이비리그가 아닌 주립대 출신이었다. 이런 내게 ‘쫌’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약된 표현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서울대가 오랜 시간 그저 one of라는 영어 표현의 예시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웃긴 것은 정작 나는 아니면서도, 누군가가 학벌에 대한 편견을 가진 얼토당토않은 발언을 하면 발끈했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싹수가 없다'는 말이 싫었다. 편협한 사람들의 시선이 치사했다. 어깨를 붙들고 항변하고 싶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나의 가족은 그렇지 않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이고 있다고 억울해 길길이 날 뛰었다. 내가 아는 그들은 하나같이 겸손하고 검소했으며 도덕적 의무를 잘하고 타에 모범을 보였는데, 그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늘 양갈래였다. 흡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양반 신분의 애신 아기씨를 향한 백정 출신의 구동매의 대사,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처럼.


세상이 변했다. 좋은 학벌이 성공한 삶을 가져다주는 세상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삶의 정의 역시 다양하다. 궁극적으로 잘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기쁘고 무엇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의 능력 안에서 어떤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고 어떤 꿈을 꿀 수 있는지. 꿈과 직업이 동의어가 아님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나아갈 힘이 있다면 당장의 직업에 연연하지 않게 됨을 알게 된다.


나는 입시에 관한 이야기 앞에 대놓고 귀를 닫는 경향이 있다. 아이의 학업에 있어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걱정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을 '방관'이라는 단어 아래, '무관심'이라는 범주 아래 넣어도 할 말이 없다. 다만, 나는 아이가 하루하루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보냄에 만족한다. 그 귀한 시간 그 어느께에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치에 맞추어 전전긍긍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아이가 무언가를 잘한다고 해서 으쓱하지도 않고, 아이가 못한다 해서 주눅 들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므로. 못한다는 것이 싫어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지, 아니면 좋아하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임을 스스로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철없는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아이가 커가며 맞닥뜨리는 입시라는 제도 앞에 생각이 변할 수도 있다. 다만, 제 아무리 입시가 버티고 있어도, 자신의 삶의 철학과 스왓분석이 완벽한 아이 앞에서 제도는 그저 제도일 뿐이라는 것을. 장애물이 버티고 서있더라도 뛰어넘을지 먼 길을 돌아 갈지를 아이가 결정할 수 있고 그 여정을 값진 자산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시는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 성공을 위한 보장 열쇠도, 성공을 향한 장애물도 될 수 없다. 보이는 것 너머의 가치를 아는 아이라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이런 나의 무모한 무식한 마음이 아이에게 독이 될 거라 믿지 않는다. 제 아무리 정보력, 재력, 인맥이 중요하다 한들,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진 삶보다 중할까. 아무리 다 갖춘 무언가가 있어도 사랑과 신뢰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삶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오래도록 달려와 이룬 성공이 언제까지 보장될 수 있을까.


아이의 학업을 위한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는 부모들을 동경하고 존중한다. 다만, 나는 수많은 육아 교육서 앞에서 이제 교육원론을 제외한 다른 책들을 잡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당장의 교육, 트렌드, 그리고 입시와 관련해 핫하다는 사람들의 책에 귀라도 한번 솔깃했을 텐데, 이제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본다.


나는 안다. 사랑과 신뢰가 이끌어주는 삶, 그 삶이 어디를 향하든 그곳은 결코 해로운 곳이 아님을. 내가 향하는 곳은 결코 아이의 앞이 아님을. 아이의 뒤에 선 채, 아이가 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임을. 그 길 앞에서 넘어지고 울고 다시 일어나는 아이를 향해 묵묵히 기도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나의 몫임을. 자신을 둘러싼 사랑의 공기 안에서 아이가 숨 쉴 수 있는 환경, 그 앞에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작가의 프레임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살의 매 순간이 문장이다. 문장이 살아 있어야 삶에 생명력이 있다. 글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이지, 부사가 아니다." <프레임, p.294>


고유한 나의 아이가 주어인 삶, 주어가 살아있는 한 문장은 계속 쓰여질 것이다. 학벌은 그저 주어에 들러붙는 부사일 뿐. 학부모로써 그리고 부모로써 나는 인생의 부사에 연연하는 삶을 과감히 끊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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