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여행 Aug 13. 2021

그까짓 수학 머리가 뭐라고!

아이에게서 받는 위로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는 수학을 힘들어한다. 내가 엄마랍시고 이 녀석에게 물려준 것은 결국 나를 닮은 느린 수 감각 하나뿐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이는 일기장에도 "수학이 싫어서 수학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고 써 놓고 힘들어한다. 50이 5개 있으면 250인 걸 2박 3일에 걸쳐 겨우 알고 나서 다시 100이 2개 있으면 102가 된다고 아이가 외치던 날.

 


아이의 수학을 봐주던 신랑은 결국, 큰 소리로 "생각을 좀 하고 대답을 하라!", "이런 게 왜 직관적으로 암산이 안되냐"고 아이에게 크게 화를 내고 말았다. 책상을 탕탕 치며 아이에게 소리치는 신랑에게서 참고 참다 결국 터져버린 깊은 답답함이 보이고,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종이만 바라보는 아이에게서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과 그것에 실패한 힘겨움이 보였다.



그들에게서 어린 시절 내가 보인다. 친정아버지는 답답함에 내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나는 워낙 혼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이였기 때문에 혼날 일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아빠에게 혼날 유일한 이유는 수학. 굴욕의 책상 의자에 앉아 나의 뇌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얼마나 느려 터졌는지를 온전히 받아내며, 내가 얻어간 것은 한 줄의 수학 원리가 아닌 "나는 글러먹었다"라는 나락이었다.

"생각 좀 하고 말해!"

"머리를 뒀다 뭐하니!"



이미 예상했던 말들, 그렇게나 많이 들었어도 단련이 되지 않아 이 말이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찬다. 머릿속은 하얘진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혼자 곰곰이 살펴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며 내게는 외계어와 같던 숫자들이 눈물과 섞여 꿈틀거리며 공기 중으로 올라오는 것을 바라본다. 툭. 눈물이 떨어지며 번져나가는 숫자와 함께 얼룰 덜룩 눈물범벅이 된 종이들을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숫자 난독증을 지닌 나의 한계 외에 내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날, 자기 아빠에게서 많이 야단 맞고 좌절을 느낀 첫째. 많이 울고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아이를 보며 나 역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아이 옆에 가서 누웠다.


"안아, 오늘 고생 많았어."아이는 눈물을 흘린다.

"안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수학이 참 느리고, 어렵고, 힘들었었어. 그런데, 엄마가 그랬어서 우리 안이가 엄마 닮아 그런가, 유독 수학이 힘들어서 어쩌니..."나오는 눈물 안으로 삼켜가며, 가만히 아이를 안아주며, 이야기했다.


"엄마, 엄마가 왜 미안해. 나는 수학은 영 못하고 이렇지만, 대신 국어는 잘하는 것 같아. 나는 엄마 닮아서 영어도 너무 재밌어. 사람은 다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는 거야. 어떻게 다 잘하는 사람만 있겠어.

아빠가 오늘날 많이 혼냈지만, 엄마, 그거 알아? 우리 아빠는 나보다 영어 발음이 더 이상하다? 아빠는 영어가 어렵고, 대신 수학은 또 잘하는 거야. 그냥 그런 거야."


아홉 살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안아주고 있는 건 분명 나인데 나는 아이에게서 위로를 얻고 그 시절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마음을 얻는다. "그래. 우리 안이가 엄마보다 낫다. 정말 대견하다. 오늘 못한 거 내일 엄마랑 다시 한번 해보자. 도와줄게."


하고 안아주는데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내가 아이를 안아주었는데, 아이가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내가 그 시절 받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몇십 년이 흘러 아이가 해준다.


아이는 나와 다르구나. 아이가 나보다 낫는구나. 정말 대견하다. 아이의 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시절, 그런 환경에서 쭈그리가 되어 한없이 구겨졌던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펴지는 기분이 든다. 수학 따위가 감히 너의 빛나는 존재를 가릴 수는 없지! 좋은 머리는 물려주지 못했지만, 그따위 것들에 너의 가치를 꺾게 하진 않을 거야. 나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희미해진 안개가 걷혀간다.



오늘 아침, 아이는 잠에서 깨서 어제 자기 아빠와 그리도 큰 소리가 오갔던 책상에 다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문제를 풀었다. 모르는 문제가 나와도 가르쳐 주지 않고 혼자 해보기로 스스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모두 해냈다. 응용문제까지, 전부 스스로 해냈다.

"엄마! 내가 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가 이야기한다.

"어머!! 안아, 정말 정말 대단하다. 엄마가 우리 안이가 너무 멋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어. 어쩜. 정말 해냈다. 너!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아이는 이제 마음 편히 자기가 어제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뒤이어 읽는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지금 이 글을 쓴다.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오는 이 마음의 정체를 가만히 살펴본다. 감동과 행복과 대견함과 사랑과 아이에 대한 존경의 소용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말해주어야겠다. 신랑의 진심을. 이미 아이는 그마저도 알고 있겠지만...


작가의 이전글 윗집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