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둘째 녀석의 등굣길 마중을 가면서 수십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길이 하나라 피할 곳 없는 등교 구조여서일까?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안녕하세요, 안이 이모.', '안녕하세요 호 이모'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날의 컨디션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아이들이 내어준 관심과 환대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활짝 웃으며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아침 인사를 맞아준다.
"누구도 잘 다녀와~ 좋은 하루 만들렴."
인사는 교문 앞에서 끊이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 헐레벌떡 뛰어가는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고. 호 엄마는 참 바쁘다 바빠."
보고 있던 주변 엄마들이 깔깔깔 웃는다.
"자기도 가만 보면 참 대단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데, 놀이터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일일이 다 말동무를 해주잖아."
오래전, 첫째 아이 친구의 엄마가 이야기했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조잘대는 아이들의 말에 조금이라도 호응해 주면 이야기는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관심을 요하는 아이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굳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생길 법도 하다. 어느 정도는 흘려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한 알 한 알 묵주 알을 굴린다 생각했다.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해 준 진심 어린 인사 한마디, 무릎을 숙여 같은 눈높이에서 들어준 이야기 한 마디, 목마를 때 주는 물 한 모금, 여름철에 나누어먹는 시원한 아이스케키 하나, 아이들끼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때, 공정하고 따뜻한 중재자로서의 이웃 아줌마가 정성 들여 기도하는 삶의 순간순간들이라 여겼다.
언젠가 이것들이 쌓여,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속상한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어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피해 갈 수 없는 학교라는 긴긴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라도 다정하고 진솔된 눈빛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다. 이 세상 모든 어른이 아이의 대체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아직은 세상이 따뜻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11년이라는 육아 기간 동안, 유독 자신의 아이만이 크게 보이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다. 본인 아이의 나이만큼 본인 나이도 줄어든 것일까? 시야가 좁고, 자신의 육아에 함몰된 채, 넓은 시각을 갖지 못하여 늘 타인의 아이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철부지 엄마들도 만남은 어쩔 수 없는 일.
실망하지 않기로 한다. 때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억울함 한 뭉치를 속으로 꿀꺽 삼키며, 나의 진심을 다해 편견 없이 아이들을 대한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아준다. 그 명확한 진리가 나를 구원한다. 그렇게 오늘 하루 우리 아이에게 웃어준 만큼, 아이 주변의 다른 친구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 그 작은 순간순간이 쌓여, 우리 아이의 미래에 따뜻한 햇살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오늘의 행운을 저축한다.
"내가 품은 작은 진심이, 훗날 우리 아이가 받을 진심이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