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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멈추었다.

살림단상, 향유하는 삶

by 고요

오전 시간, 집에 있으면 눈에 밟히는 집안일들에 나의 귀한 시간을 내어줄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함께 나오곤 했다. 따스한 볕 아래에서, 카페에서, 동네 도서관에서 조금이라도 숨 쉬듯 글을 쓰고 나면 살 것 같았다. 정리되지 않은 집은 그대로이지만, 일단 내 마음 한 곳이 숨 쉴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겼다. 그러나, 나만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이들의 간식은 냉동식품으로 대체되었고, 아이들의 저녁은 외식으로 대체되는 날들이 늘어났다.


하교하며 다시 맞는 아이들의 집은 포근하고 단정한 공간이 아닌, 지난밤 자고 일어난 그대로의 방치된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동안 산소같이 느껴졌던 글을 쓰는 시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직무유기와 죄책감이 얼룩진 어쩐지 떳떳하지 않은 나만의 활동으로 변질되었다. 무언가 불편했다. 어딘가 잘못됐다. 글 속의 나는 단정하게 포장되었지만, 삶 속의 나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 안의 이면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어느 날, 나는 글과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매일 같이 기록하던 블로그를 닫았다. 종종 올리던 브런치의 에세이를 멈추었다.


글과 멀어질수록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 안에서 보이던 나의 삶이 아닌, 적나라한 지금의 삶, 온라인 공간이 아닌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내가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널브러진 옷가지들,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려운 냉동고 속 성애 낀 비닐, 구멍이 나도 꿰매지 않은 양말, 치워지지 않은 서랍장 속 물건들. 그동안 내가 쓴 글 속에서 정직하게 마주했다 여겼던 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날 것의 내가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나는 아직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생을 키우는 엄마, 나를 찾는다는 이름 아래 투자했던 시간들 안에서 어쩐지 떳떳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설명하기 어려운 이런 직무유기가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내가 찾은 보물은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였다. 목표 지향성의 삶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 아이가 아픈 이후, 내가 찾은 보물은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기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자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이 순간을 넘치도록 누릴 수만 있으면 된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마흔 중순이 넘어서 진심으로 삶을 향유하기로 하였다. 삶을 누리어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주변을 살핀다.


'일상의 소중함'을 마음에 담고 싶어 가장 먼저 한 것은, 놀랍게도 살림이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일, 구시렁대다 못해 평생 담아보지도 못한 욕이 나오게 만들었던 요리, 매일 해도 그 자리였던 도돌이표의 늪, 빌어먹을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게 만들었던 살림 안에서 나는 매일 기적을 만나고, 나 자신을 환대해 준다. 단정한 공간과 마음이 담긴 요리로 고된 일과를 끝내고 돌아올 가족들을 환대해 준다.


오늘도 아일랜드 식탁은 시장에서 사 온 부추 한단과 급하게 채 썰을 양파와 당근 조각들, 기름으로 얼룩져 정신이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 맞이하게 될 부추전이 한창이다.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가득 웃음이 넘친다. '요리를 하며 기쁠 수 있다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구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 매일 뭐 해 먹나 고민하고 무언가 해먹고 치우는 일, 그 보이지 않는 노동 앞에서 먹고사는 것이 일이구나 여겼던 순간들. 하지만 매 순간을 향유하기로 여긴 이후 만나는 이 일련의 반복된 활동 앞에서 넘치는 감사함을 끌어안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최소한의 품격, 김기석, p.190>


부지런히 치워진 아일랜드 식탁, 언제 그랬냐는 듯,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하지만, 누가 일부러 찾아 들추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 사이에 조용하게 행해졌던 노동 앞에서 오늘 하루도 겸손해진다. 먹고, 입고, 잘 수 있다는 것에 넘치도록 감사하며 잠시 짬을 내어 지금 이 마음을 기록해 본다. 오늘치의 온전한 사랑을 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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