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단상, 비워내는 삶
이사를 하며 많은 물건을 비웠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미래의 언젠가 쓰일 것만 같아 물건을 쟁여두었고, 과거의 언젠가를 추억하며 위로받고 싶어 물건을 보관해 두었다. 버리면, 당장이라도 소중한 과거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버리면, 당장이라도 불안한 미래가 찾아올까 초조했다. '지금, 현재'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그렇게 물건으로 대체되어 집안 어딘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건을 살펴보다 보니 나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원래도 물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 꾸밈과 관련한 물욕은 없어도 책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에 한하면 다행이게, 오래전 필기한 공책, 편지, 작품 등에도 미련이 남아 언젠가는 열어보지 싶어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것이 한 박스.
추억을 담은 상자를 보관하기 위하여 옷을 비웠다. 꼭 필요한 옷 몇 가지를 남기고 전부 헌 옷 수거함으로 돌리고, 헐거워져 텅텅 빈 드레스룸의 한편에 대신 추억의 박스를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추억의 박스가 늘 창고 속 먼지 구덩이를 입고 꺼내려면 이중 삼중의 노고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언제든 손쉽게 열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빈 공간에 추억을 놓아두었다. 추리고 추려 아직까지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많은 추억을 한꺼번에 담는다. 언제든 손쉽게 열어볼 수 있어 감사하며....
그렇게 빈 공간에 추억을 놓아두었다. 추리고 추려 아직까지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많은 추억을 한꺼번에 담는다. 언제든 손쉽게 열어볼 수 있어 감사하며....
평생을 화장대 없이 살았다. 그러다, 마흔이 조금 못 될 즈음에서 이사를 하며 아파트에 작게나마 화장대가 인테리어로 들어가 있는 곳에 가게 되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드디어 나도 화장실이 아닌 공간에서 로션을 바르고, 귀걸이를 할 수 있구나 설렜던 기억도 잠시, 어린아이들을 돌보느라 바쁜 어미는 얼굴에 로션 한번 제대로 바르고 외출할 일이 없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로션 한번 바르는 일이 사치가 되었고, 로션도 그러한데 화장을 웬 말이라며, 그저 단정한 차림새와 환한 미소로 예의를 차리자고 마음먹었다. 빠른 피부 노화를 담보로 한 이런 습관은 그 후 몇 년을 지속되고, 결국 화장대 안 수납장은 텅텅 비어있다.
화장대의 거울문을 열어보면 선크림 하나, 에센스 두어 개, 아이크림 하나, 매니큐어 하나, 아이라이너 하나가 메이크업 용품의 전부다. 예의를 차려야 하는 공간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액세서리인 귀걸이 몇 개만 남기고 전부 비운 화장대는 어찌 보면 조금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거울로 달린 문을 열고 텅텅 빈 화장품들을 바라본 후 다시 문을 닫아 나의 맨 얼굴을 마주할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얼굴에 바르기보다, 얼굴로 스며들게 나의 생각과 행동을 품격 있게 하자."
그렇게 매번 텅텅 빈 화장대 앞에 선 나는 자글자글한 주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기로 다짐하곤 한다.
없는 물욕은 비단 화장품, 옷뿐만이 아니다. 내게는 핸드백 두 개가 가진 가방다운 가방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모두 에코백. 그리고 배낭 하나. 이 물건이 내가 가진 가방의 모든 갯수이다. 핸드백은 그마저도 쓰지 않으니 더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며칠 전, 쓰지 않는 배낭 하나를 당근(페이스북 마켓 플레이스와 유사한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쓰는 중고 판매 플랫폼)으로 보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필요한 누군가에게 닿아 기쁘게 쓰이고 있을 생각에 마음이 좋다.
현재가 아닌, 미래와 과거에 얽매인 물건, 필요한 물건만 골라내어 사는 삶. 그동안 정말로 필요하였는데, 차마 삶을 돌보지 못해 간과하고 지냈던 삶이지 않았을까?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을 골라내는 동안, 나를 더 알아가고 나를 찾게 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미니멀리즘에 발도 들이지 못할 부족한 살림살이라지만, 조금씩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덜어내고 또 덜 어내며 핵심만을 남겨, 내 삶 한가운데에 놓고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오늘도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치움을 시작한다. 일단, 청소부터!
*다음 편에는 물욕 없는 여자의 물욕 2탄, 여행과 책에 대해 쓸게요^^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