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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 없는 여자의 물욕 2편

살림단상, 추억과 책이 가득한 공간

by 고요

이사를 하며 내심 기대를 했다.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므로 이제 거실을 조금 더 깔끔히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곳에 물건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솎아 내야만 했다. 때를 지난 책과 장난감처럼 비교적 정리가 수월한 아이템부터 자꾸만 간직하고 싶어 손이 가는 오래된 책과 노트까지, 숨길 수 있는 공간에 숨겨 놓고 나니 당분간 거실만큼은 엔간히 깔끔해 보였다.


알록달록한 어린이집 형태의 지난번 집과 달리 화이트톤의 모던한 느낌의 지금 집에서, 내게 가장 큰 물욕이었던 책과 여행을 마음껏 뽐내본다. 톤 다운되고 물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두었던 소비들이 더욱 도드라진다. 냉장고 표면은 덕지덕지하나 그 앞에 서서 하나씩 자석 구경을 할 때마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하나 둘 되살아난다.

딸과 아들이 고른 자석은 같은 여행지여도 다른 취향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언젠가 또다시 가게 될 날이 있을까?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갔던 날들의 기억. 어찌 보면 실로 맞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그 나이대에 그곳에서 함께 할 일은 이제 내 인생을 통틀어 없을 테니까.


자석과 머그컵. 여행지에서 늘 가져오는 기념품. 가져오기에 비교적 간단한 자석과 달리 머그컵은 품이 많이 든다. 깨지지 않게 보통 컵 안을 속옷으로 채우고 컵 바깥을 티셔츠로 돌돌 만 다음, 캡 등의 모자에 쏘옥 넣어오곤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져온 컵들은 독서의 좋은 벗이 되어준다. 아이들이 손쉽게 찾아 마실 수 있게 컵은 주방 하부장 식기세척기 옆에 두는데, 이곳을 열 때마다 진한 행복이 올라온다. 읽을 책이 있고, 마실 차가 있고, 마실 컵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단촐한 공간이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부분을 만나며, 매일 채우는 기쁨이 가득한 날을 맞는다. 물욕을 버리고 비운 자리가 있었기에, 꾸려 넣을 수 있었던 진짜 원했던 물건들. 언젠가 사라지고 없을 이 세상에 가장 나를 기억하기 좋은 물건들로 차곡차곡 채워넣는 기쁨을 누리며,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컵으로 커피를 마실까? 미소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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