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반장, 부반장을 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임원이나 대표 등을 맡는 게 어렵다. 일종의 반장 콤플렉스랄까... 중학교 1학년 때 꿈을 가끔 꾼다. 경기도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반에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여자아이들 중의 3분의 1 가량이 그런 아이들이었다. 그 친구들과도 대부분 잘 지냈는데 이상하게 Y라는 아이가 날 참 싫어했다. 방송반이었던 내가 아침 방송을 하면 큰 소리로 교실에서 내 험담을 했다기도 하고, 반장으로서 뭔가를 할 때면 종종 딴지를 걸었다. 그런 Y를 난 무서워했다.
아직도 가끔 꿈에 Y가 나온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신경에 거슬릴 만큼 나를 살살 긁는다. 꿈속에서 나는 여전히 거기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다. 심장만 콩닥콩닥 불안해할 뿐이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Y가 두렵고 싫다. 당시 무력했던 내가 한을 품었는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무의식 속에 갇혀있다.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물러서거나 대응을 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그게 상처로 남는다. 주로 무력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인 것 같다. '나는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하는 류의 후회들이 마음속에 생채기를 남기고 지나간다. 안 그래도 너덜 해진 마음에게 오히려 2차 공격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평소에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남과 갈등이 있거나 할 말이 있는 상황이 오면 눈치 보여도 일단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보자고. 그러는 편이 좋은 사람으로 남지는 못할지언정 나 자신을 덜 자책하고 덜 후회할 것 같다고...
평소에 생각한 대로 행동이 나가는 건 순간인 것 같다. 어제였다. 몇 달 전부터 어떤 모임의 운영진을 맡게 됐다. 사실 반장 콤플렉스가 있는 내게 운영진은 아직도 좀 버거운 자리이다. 그러나 시간도 꽤 지났고 내공(?)도 쌓였을 거라 생각해서 덥석 하기로 했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아침 약을 깜빡해서 등등 여러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어제 있었던 사태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균형 잡기'의 실패였다. 나는 모임원과의 언쟁에서 이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갈등의 요지는 우리 모임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새로 오신 분이 집에 돌아가는 대중교통 안에서 내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오늘 있었던 대화들이 '쓸데없는 것'들이 많았고, '잡담'이 이어지는 데도 운영진인 내가 '방관자'로서 방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분의 워딩이 내 마음에 탁탁 걸렸다. 내 자존심이 건드려졌고 예전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왜 당신의 단어 선택과 어투가 기분이 나쁜지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감정적으로 그분을 대하고 말았다. 논리나 기세(?)로 그분을 이겨 사과를 받아냈다. 그런데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하루종일 뭔가 걸린 것 같았다. 갈등 자체를 싫어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석하고 조금 자책도 하게 됐다.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다. 그러면서 드디어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왔는데, 인간 세상에 회의감이 들었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작은 걸림에도 흔들리는 내 존재를 가지고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지...' 등의 생각이 들었다.
엄마랑 전화 통화하다가 문득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엄마가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모임에 나온 거네~'라고 하셨다.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랬구나... 오늘 하루종일 뭔가 놓친 것 같더라니, 이거였구나. 알아서 반가운 게 아니라 좀 허무했다. 상대방은 본인 삶을 나누고 또 다른 사람의 깊은 이야기를 들으러 우리 모임에 온 거였겠구나. 그게 충족이 안 되니 불만이 있으셨겠구나, 뒤늦게 이해가 됐다.
내가 지지 않기 위해 이기려 애썼다. 패배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 입장을 설명했고 결국 사과를 들었다. 그런데도 패배감과는 다른, 자책과는 다른 뭔가를 잊은 듯한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잊은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걸 놓쳐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었던 것 같다. 아직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달하진 못했지만, 내 속에서 상대와 화해를 하니 평화로운 마음이 다시 찾아왔다.
이기거나 혹은 지거나. 단순히 세상을 보면,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택지는 딱 두 개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임원이 되었을 때 늘 내 행동에서 어떤 모자람을 느꼈는데 그게 오늘 보니 이 이분법에서 발생한 것이었던 것 같다. 내가 옳으면 Y는 틀린 사람이 된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는 Y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다. Y가 옳으면 내가 틀린 사람이 된다. 용기 있게 나를 변명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자꾸 초라해진다. 그러니까 답은 이기고 지는 것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다. 상대와 나 모두의 입장을 포용하며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어제 있었던 갈등에서 사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내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안의 의중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분이 내게 제기한 문제를 '나'라는 운영진이 부족하다는 공격으로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겨야 했고 그분은 져야 했다. 설령 그분의 문제제기를 실제로 반영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마음을 알아차려줬다면 그분이 그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 사람의 말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아쉬움이 있었다는 걸 내게 알아달라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운영진은, 임원은 맞고 틀린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의중을 들어주는 사람인 것이다.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우리 모두의 속에는 '불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니깐 부처님의 성품이 잘 보면 우리 마음에도 다 들어있다고 한다. 내가 누군가를 이겼을 때, 누군가의 마음을 무시했을 때 느끼는 불편함은 어쩌면 그 불성이 꿈틀대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남들과의 충돌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균형 있게 대응하는 것이 결국 내 마음이 진정으로 편해지는 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