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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Jun 28. 2024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 때

부모님에 대한 깊은 애증 때문일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걸 견디지 못한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렇다. 그런데 살면서 딱 몇 번,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죄송했던 적이 있었다.


제일 첫 번째 경험은 백일출가 때였다. 날 미워하던 분은 아버지 또래의 같은 기수 행자님이었다. 그분은 노동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행동이 빨라서 가끔은 위험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나는 행동이 느린 편이다. 특히 20대 초반에는 더 그랬다. 백일출가 때는 일 수행이란 걸 한다. 일 수행이란 일을 하면서 일어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흘러 보내는 연습이다. 그때 J 행자님과 같은 일 수행 조였다. 사사건건 부딪쳤다.



비 오는 날의 대웅전


생각을 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일을 시작하는 나와 일단 몸을 움직이고 보는 J 행자님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잦았다. 내가 한 번, 행자님이 한 번 서로에게 큰 실수를 했다.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절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퇴비를 치워줘야 한다. 삽으로 푸는 작업을 일 수행으로 하게 됐다. 조별로 일하기 전에 모여서 일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실언을 했다. "J 행자님 옆에는 안 가야지. 똥물 튈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내 말에 웃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말에 행자님의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것을.


또 한 번은 비계를 정리하는 일 수행을 했다. 비계에 달려있는 조임쇠(?)들을 몽키 스패너로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갑자기 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내려다보고 있던 비계 중 하나가 번쩍하고 내 얼굴로 튀어 올랐다. J 행자님이 지나가면서 비계 끝을 세게 밟으셨고 반대쪽 끝이 들리면서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온 것이다. 다행히 내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안경의 코 부분이 내 코를 세게 치는 데에 멈췄다. 그렇지만 그게 무진장 아팠고 또 놀란 나는 삐뚤어진 안경을 벗어던지며 얼굴을 부여잡았다. 옆에서 "J 행자님, 그걸 밟으시면 어떡해요!" 비슷한 소리가 들리자 나는 화가 불꽃처럼 일어났고 이렇게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쇠 막대기를 비계라고 부른다


두 번째 일이 있고서 나는 남는 시간에 대웅전으로 향해 절을 했다. 너무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다. 날 다치게 한 행자님의 행동에 정말 화가 났다. 그런데 불교에선 화가 나는 이유는 상대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내 아집 때문이라고 본다. 상대방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때 나는 불교 교리가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화가 일어났다면 지금 나는 크게 놓치고 있는 거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숙이기 위해 절을 시작했다.


한참을 참회의 절을 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옛날 일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 친구와 손바닥을 마주치는 장난을 치다가 뒤로 넘어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단소로 옆에 서 있던 친구의 앞니를 쳐서 부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아프고 내가 원망스러웠을까. 지금 내 마음과 같았겠지, 싶으니 '아, 그때 과보를 내가 받는 건가 보다.' 싶어 지며 억울함이 가셨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J 행자님은 나를 피해 다녔다. 나는 미움받는 것을 싫어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성격은 날 미워하는 사람에게 계속 다가가서 어떻게든 그 사람의 화를 풀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한다. 그래서 J 행자님에게 더 열심히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쭈뼛거리며 사과도 건넸다. 그렇지만 신통치 않았다. J 행자님은 내게 많이 서운하고 화가 나셨던 건지 아예 날 없는 사람 취급하셨다. 자꾸 다가가는 것도 그분을 귀찮게 만드는 것 같아 몇 번을 시도한 후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냥 시간을 흘러 보냈다. 결국 J 행자님이 먼저 내게 다가오셨다.


백일출가를 시작할 때 삼일동안 만 배를 해야 입재가 가능하다. J 행자님은 절에서도 사셨던 분이라 절을 하는 것에 익숙해서 우리 중에 거의 첫 번째로 주어진 절을 다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거기다 싫어하는 걸 정말 하기 싫어해서 하루종일 그것도 삼일을 낯선 절을 해야 하는 건 정말 엄청난 부담이었다. 마지막 날은 밤을 지새며 남은 절을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나 같은 어린 행자들이 꽤 있었다. J 행자님은 우리 옆에서 힘을 주시기 위해 같이 절을 해주셨다. 그 행자님은 행동은 다소 거친 면이 있으셨지만 마음은 그렇게 따뜻하고 여린 분이었다.


J 행자님은 나와 함께 절을 하며 나를 응원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내가 그간 사과하기 위해 애쓴 것도 알고 계셨다. 내게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며 이해해 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동안 날카롭게 상처받았던 내 마음도 녹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렸고 또 어렸던 만큼 참 잘난 줄 알았던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내가 맞고 J 행자님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내 맘 속에 있으니 나도 모르게 그분을 조금 무시했다. 그런 마음이 묻어있는 내 말들이 얼마나 그분에게 큰 상처였을까. 그것도 딸처럼 생각하고 응원하던 행자가 본인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뒷목이 뻣뻣해질 만큼 부끄러운 이야기다.


백일출가 어느 날 절을 하다가 문득 돌이킨 내용이 있었다. 아, J 행자님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잘 살아오셨구나. 나는 항상 그분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동 현장에서 대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쌓아온 베테랑이셨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후에, 조별 일 수행을 할 때 나는 내 의견을 내기보단 그분이 하자는 대로 해보기 시작했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잘 됐다. 그리고 그분의 기분도 참 좋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우리 조의 분위기도 으쌰으쌰 더 좋아진 듯도 했다.


지금은 거의 잊고 산다. 절도 하지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희미하게 남아있다. 화가 날 때면 그 화를 쏟아내는 것에 멈추는 게 아니라 뿌옇게나마 '아, 내가 지금 또 뭔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구나.' 생각한다. 누군가가 미울 때도 이젠 행자답지 않게 입으론 그 사람이 싫고 이렇고 저렇고 원망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론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구나.' 생각한다.


어릴 때의 내 패기가 참 지금 와서 보니 대단했던 것 같다. 지금은 불교 교리는 교리고, 현재의 내가 느끼고 살아가는 세속의 방식은 따로 있다고 둘을 분리해서 보지만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난 그렇지 않았다. 교리를 믿었고 교리에 어긋나면 내 마음을 돌이키려 노력했다.


'초발심시변정각'이란 말이 있다.  처음 마음을 냈을 때가 정각을 이룰 때란 뜻이다. 초심으로 계속 정진할 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을 쓰며 내 백일출가 시절을 떠올려 보니 그때의 초심이 떠오른다. 많이 닳았지만 또 한 번 그 초심을 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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