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어머니랑 운동을 하러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번에 고향 내려왔을 때 아주 마음이 심란하던 때가 있었는데?' 불과 5개월 전이었다. 회사에 우울 스펙트럼으로 인해 질병휴직을 하겠다는 의사를 비친 직후에 불안한 마음으로 부모님 댁에 왔었다. 그때 나는 정신과를 옮겨 기존에 먹던 신경안정제를 끊은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단약 때문이었는지 그때 나는 혼자 있는 게 힘들었다.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났다.
회사에선 늘 밝고 상냥한 모습만 보이려 애썼었다. 그래야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한 사람의 신들린 개인기가 중요하기보단 여럿의 협력이 더 중요한 곳이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능력 있는 조직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내 힘듦은, 연약함은, 상처들은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치워져야 했다. 애초에 없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많이 웃고, 잘 듣고, 상사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협조적인 모습을 유지하려 했다. 어떤 합리적인 목표가 있다기 보단, 강박적으로 그랬다.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다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울음을 삼켰고, 교묘한 말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던 동료에게 화가 나도 속으로 삭였다. 워낙 평판과 소문이 중요한 곳이어서 그랬다. 그런 회사에 스스로 우울과 불안이라는 치부를 드러내다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내 비밀을 알린 적이 없었다. 그만큼 휴직이 내게 절실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많이 불안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동정할까,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나와 얽히기 싫을까 등등. 번뇌가 치성했고 안절부절못했다. 오늘 그때 내 심정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 복직이 딱 한 달 남았다. 5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갔고 또 상담을 받았다. 일단 회사를 가지 않아 직원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지자 서서히 안정이 찾아왔다. 그렇게 중증 우울 스펙트럼에서 경증으로 호전됐다. 특히 거의 불안은 느껴지지 않는다.
'불안'이란 감정은 사회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 같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가족들, 친구, 지인들과 있을 때 크게 불안을 느낄 일이 없다. 돌아보면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집단과 물리적으로 가까울 때, 혹은 계속 접촉해야 할 때 나는 크게 불안했고 숨고 싶었고 대인기피에 힘겨워했다. 거기엔 진짜 느끼고 생각하는 '나'와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나'의 간극이 늘 존재했던 거 같다.
쓸모 있게 보이고 싶고 내가 속한 조직에서 배척당하고 싶지 않은 것. 그건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유독 이런 자연스러운 욕구로 인해 번번이 괴로워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걸까.
아주 명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일단 상대방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려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상사와 있을 때 긴장도는 높아지고 더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상사와 식사하는 게 긴장이 많이 된다. 한 번은 우리 과의 과장님보다 높은 분과 단둘이 순댓국을 먹은 적이 있었다. 상대의 말에 반응하고 그가 편안히 느끼도록 대답하느라 순댓국 속 고기를 거의 씹지도 않고 삼켰다. 나는 자주 상대가 나보다 중요하다.
이런 내 성향은 내가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의지해야 할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상담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나는 그분들이 좋아할 만한 태도를 종종 취할 때가 있다. 의사 선생님의 조금은 논점에서 거리가 있는 수다도 기쁜 표정으로 열심히 경청하는 척하고, 상담을 받을 때도 상담선생님의 마음을 내 마음보다 더 배려하기도 한다.
더 선명한 예로는 얼마 전에 친구와 산책을 했을 때가 있다. 사실 전날 밤 잠을 못 잤고 신발에 쓸려 뒤꿈치 쪽에서 피가 나서 산책이 힘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친구의 기분이 우선이었다. 친구가 걷자고 했고 즐거워해서 신발을 꺾어 신으면서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아프다는 걸 나 스스로 알지도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친구가 카페에서 내 발을 발견했다.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했어?'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이제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여러 혼란과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미소 뒤에 숨지 않을 수 있을까. 보이고 싶은 내가 아니라 실제의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그 무엇보다 나를 우선시하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피가 나는 발을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려줄 수 있을까.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휴직 기간을 친구의 말대로 '1개월 장기휴가'로 기쁘게 여기며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