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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씨 Jun 13. 2016

물감을 샀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을 시작했다.

물감을 샀다.


나에게 색은 무척이나 어렵고 친하지 않으며 기피하는 대상중 하나이다. 지금은 키도 크고 머리는 더 커져서 어깨가 좁아 보일만큼 많이 성장했지만 예전에 국딩과 중딩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도 색약검사에 부끄러워했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래서 나의 그림에는 검정색 말고 다른 색이 없다. 만화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 시절에는 컬러는 100회 특집이나 설날 이런 시기에 가끔 한 페이지 들어있고 모두다 흑백의 선으로 이뤄진 그림들이 전부였으니까.


그림을 그린지 5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오랜시간 정말 느긋하게 그려서인지 실력은 그리 많이 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펜을 잡고 있는데 무척이나 대견해지는 그런 의미로 혼자 어깨를 으쓱해본다.


연필과 검정색 펜으로만 그렸던 지난 기간동안의 그림들을 보면서  작은 고체물감을 주문했다. 막연하게 내 그림에 색을 넣고 싶었고 그냥 두려워하던 모습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50% 세일하는 고체물감이 사고 싶었고 나는 물건을 소유하겠다는 소유욕에 나름의 이야기를 부여한것이 더욱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한번쯤은 못 먹어도 GO!를 외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샀고 남들 다하는 파레트에 물감 색을 하나씩 칠하는 매우 식상하고 진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다. 

역시나 대상과의 같다 다르다는 중요하지 않고 단순히 그리고 칠하는 행위에 만족하는 그림이 나에게 맞다. 색도 마찬가지로 같다 다르다는 뒤로 미루고 내가 그린 선들 사이에 색이 입혀지는 그 순간에 즐거움을 느꼈다.


물감을 사면서 회색/검정/하늘색의 마카도 구매를 했다. 마카로 그린 그림들이 멋있어 보여서 마카가 뭔지도 잘 모르고 20색 세트를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그 마카는 몇번 사용하고 조카들의 낙서용 크레파스로 변했고 이미 공중분해되었다.


번짐도 이해를 잘 못했고 사용법도 몰랐다. 막연하게 써보고 싶어서 샀는데 그 뒤로는 한번에 많은 양의 미술 재료를 구매하지 않았다. 


그냥 써보고 싶은 색 3가지만 골라서 주문했고 그 중에서 회색은 정말 맛있게 자주 사용했다. 리필 용액 꼭 주문해야겠다. 아울러 다른 회색들도 몇개 더 장바구니에 담아야지.


달리는 버스에서 그림을 즐거움을 동반한 멀미를 하게 만든다. 버스 맨 뒷 자석에 앉아 손에 힘을 최대한 빼고 버스의 덜컹거림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회색 마카로 조금 칠하고 물감으로 살짝 포인트만 준다. 내 그림에서 물감이나 색의 역할은 보조이지 선으로 그린 그림의 영역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아마 완전하게 색을 가지고 놀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된다. 아직은 선이 더 좋기에


평상시면 이렇게 그리고 선과 검정색을 넣어서 명암만 추가하고 끝을 낸다.

마카도 있으니 괜히 칠하면서 멋을 낸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지만 내 기준에서는 멋있다. 그림 그리면서 점점 자뻑이 늘어간다. 그래도 좋다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아니니까.


방 정리를 하다 몇 년전에 그렸던 그림을 처음 시작했던 그 때의 연습장을 찾았다. 저기 있는 노트북은 델 미니9인가? 그리고 핸드폰은 소니 엑스페리아 1 , 아마 신림동 고시원이겠지.


춥고 배고픔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에 가득차있던 그런 시간이라 생각된다. 


그림에 변화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신의 예전 수첩이나 노트를 보면 막상 그 생각은 사라진다. 하루에 하루를 더 해서 감각이 무뎌질뿐 그림은 항상 발전하고 변하고 있다.


용가리통뼈도 아니고 그리고 싶은 그림의 스타일을 밑그림 없이 흉내내서 그려본다. 한번씩 덤볐다가 왕창 깨지고 난 뒤에 좌절감도 느끼고 반성도 한다.


공부하고 연습하고 다시 덤벼야지.


마카로 하늘색만 포인트를 줬다. 이런 스타일이 나랑 잘 맞는 느낌이다. 


색은 거들뿐.


또 덤빈다.

그리고

또 깨진다.


공부를 더 하고 오자.

내가 더 노력해야지.


요즘은 도로마다 공사가 많다. 중장비들을 좋아하는데 사진으로 자료를 남기고 카페에서 느긋하게 그려본다. 기계는 그리기 편해서 좋다. 


편한것만 그려서 사람과 동물은 수줍음에 극치를 달리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극복할 과제중에 하나이다.


중장비들은 대부분 노르스름한 분위기다. 



고등학교 등교 할 때 항상 친구가 오토바이로 태우러 왔다. 마그마였는데 가끔 그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가면 마치 레니게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가방에서 레밍턴(기억이 가물가물가물치함)을 꺼내들면 딱이겠지만 우린 논두렁을 달리고 그랬다.


오토바이는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보는 것은 좋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나는 그냥 걷는게 좋다.


귀엽다.

엄청 큰 트럭인데 이런 귀여움이라니.


물감이 있어서 쉽게 그릴 수 있었다. 물감을 잘 샀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한다.



스타벅스가 생겼다. 가깝다고 좋아했더니만 집에서 걸어가면 15분이 걸린다. 이건 너무 어정쩡하다.


새로운 도구 "워터브러쉬"를 영입했다. 

물론 아직도 나를 애먹이고 있다. 

나쁜놈



가방에 항상 넣어 다니는 단짝이 있다. 라미 만년필과 몰스킨 스케치북.

 꼭 둘만 이용하는 고집스런 성격은 아니기에 종이나 펜 아무거나 좋다. 


하지만 물감이나 마카를 사용하니 이제는 얇은 종이보다 스케치북이나 워터컬러용 종이를 우선으로 찾는다. 펜화를 그릴때는 저렴한 취미였는데 이제는 비싼 취미로 변해간다.


사람은 변하고 환경도 변한다. 취미도 비싸게 변한다. 


님아 이러지 마세요. 

포인트! 포인트! 기억하세요 물감으로 떡칠하지 말고!


반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귀엽다.

이러다가 중장비 시리즈 하나 내놓게 생겼다.



구독알람이 가끔 온다. 

미안해서 잠자려는 도중에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쓴다. 구독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소식을 전하고 싶었고 말보다는 그림을 보여주는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그리고 있어요. 

즐거울 때도 있고 솔직히 귀찮음도 있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그려요. 

그래서 오히려 더 좋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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