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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Dec 24. 2023

밀도

계동

시간을 착각하는 일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하며 온몸을 움츠리며 살다가 기지개를 켜는 날 실수를 한다. 오늘 계동 가는 날이 그랬다. 정독도서관이 조금 빠르게 재개관을 했다는 소식을듣고 예약 걸어둔 소설 ‘파친코’도 수령할 겸, 겸사겸사 계동 산책도 하고 싶어서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대충 본 탓에 개관 시간이 7시 시작이라는 안내문구만 보고 일찍 움직인 것이다.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탑승한 버스는 오늘이 주말이라기에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다행히 하차할 때까지 버스 안에서 계속 나 혼자였다. 그래서 여유로운 승차때와는 달리 하차할 때 기사님께 용기 내서 ’ 감사합니다!‘ 하고 하차 태그 찍고 우다다다내렸다. 왜냐하면 감사합니다를 외치는 내 목소리가 예상과 다르게 사방으로 갈라져 나왔고, 누군가가 버스에올라타고 있었거든.., 버스기사님 표정이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생각 그만.

도서관은 열려있었지만 자료실은 09시부터 운영한다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뒤늦게 발견하곤 머쓱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새로 리모델링한 정독도서관에 휴게실이 따로 생겨서 언 몸을 녹이며 기다릴 수 있었다. 이 공간이 원래 있었는데 내가 모른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크고 아늑하고 조용한 휴게실은 그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본 적이 없었다.


정독도서관이 닫혀 있는 동안, 산책도, 책을 보는 것도 동대문에서 해결했던 터라 이 동네는 꽤 오랜만이다. 그동안 계동에 올 때면 광화문으로 와서 종로 11번 버스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글 쓸 장소를 찾아보니 집 앞에 오는 버스가 도서관과도 가까운 거리에 정류장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늘 가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가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기분 좋다.


오랜만에 가는 곳인데 최적의 루트까지 발견하다니. 비효율적이고 손 많이 가는 아날로그적 인간이면서, 거리 계산할 때는 효율 따지는 나다.



오랜만에 걸었던 계동길은 명성답지 않게 한산했다. 영업을 준비하는 사장님들의 분주한 손길이 가끔씩 보이긴 했지만, 몇 발자국 발걸음을 옮기면 금세 끊겼다. 조금 있으면 가장 바쁜 곳이 되겠지만, 정적이 사뭇 어색해 고개를 돌리면, 비어있는 자리를 참새들이 짹, 짹, 짹 포롱포롱 거리며 채웠다. 내가 보지 못했던 사람의 인기척은 런던 베이글 앞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이 추위에 줄 서 있는 그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며, 가방을 고쳐 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헌법재판소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도서관을 마주할 찰나, 귀여운 눈사람이 환영하기라도 하듯 서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오후 2시까지 책을 읽었다. 혜화동의  좁은 고시원에서 나와서 햇살을 충분히 받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득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읽고 싶은 좋은 책들이 많았고, 그 책들은 나에게 매분 매초 기분 좋은 울림을 주었다. 아무리 지루한 책이어도, 이상하게 잘 읽혔다. 약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조금씩 가벼워진 느낌. 지금껏 무겁게 담아왔던 근심이 증발되는 기분이다. 도서관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가득했다. ‘아 좋다…’라는 속삭임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빠져나간 것들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밀도 가득한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어내리는 사람의 얼굴도, 가족끼리 사진을 연신 찍으며 웃는 사람들도 모두 호의적일 것만 같다. 여기선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다르게 온화하게 느껴진다

도서관 식당인 소담정에서 1번 손님으로 맛있고 뿌듯한 기분으로 치즈라면을 먹었다. 입가심으로 캔커피를 마셨다. 도서관은 항상 거쳐가는 곳이었지 오래 머무는곳이 아니었는데, 역시 책은 면심으로 읽는다. 땡고추가 칼칼하게 잘 우러나온 치즈라면이 내 취향이었는지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도서관 갈 때마다 사 먹고 싶을 정도로.

이 정도의 배부름이라면 초단편 소설정도는 필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 매점에서 구매한 캔커피 뚜껑을 따는데 라면을 먹고 나서도 뚫릴랑말랑 했던 코가 갑자기확 뚫려서 당황했다. 도대체 하루종일 꽉 막고 있었으면서 어디에 힘을 주면 코가 뚫리는 건가.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늘 밤에 써먹어야 할 텐데.


캔커피를 마시자 그동안 캔에 갇혀 있던 밀도 높은 아메리카노 향이 입에도, 도서관 복도에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오늘 여행 아닌 여행은 생각보다 나에게 새로움을 준다.  



‘살아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by 마르셀프로스트


오늘 일상은 온통 밀도로 채워져 있다. 꾹꾹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주신 직원분들도, 주말에 근무하시는 분들 덕에 마음껏 내려놓고 책을 탐독하는 시간에서도, 글을 쓰기 위해 주문한 따뜻한 커피에도 오늘의 감동이진하게 들어가 있다.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 일상 중에 흘러들어오는 감각을 흘려보내지 말고 기록하자. 좋아하는 작가의 초단편소설을 통으로 필사하기도 하는 것도 좋고, 도서관 복도에서 틈틈이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타이핑하며 적어도 좋다.

오늘의 동네여행을 통해서 계절을 감각하는 일은 나의 오랜 우울증에도 도움이 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책을 매일 조금씩 빌려와서 읽어야겠다. 도서관에 가면서 계동을 산책할 것이다. 산책을 하기로 할 때마다 계절도 바뀌고 나의 주변도 바뀌어 가겠지.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젊음도 말이야.


오늘은 좀 걸었으니까 밤에 푹 잘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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