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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 싶은 글이 생길 때마다 노트를 새로 꺼내 날짜를 쓰고 글을 적는다. 대개 그런 날은 엄청난 좌절감을 겪거나, 하루에 한 가지씩은 엄청난 감동을 가졌거나, 상상으로 한 실연의 아픔을 겪은 날이다. 그런 날에는 글을 아주아주 많이 적는다.
그리고 개운해지면 내 글을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원래부터 나란 사람은 괜찮았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나의 노트는 거의 대부분이 앞부분만 새까맣고 뒷부분은 텅 비어버린 모양새를 하고 있다. 꼼꼼하게 채워지는 일 없이 매일 새로 나오기만 하는 내 노트. 마침표는 쓴 적이 없고 말 줄임표나 대충 줄여놓은 말만 가득한 내 글 노트.
그런 노트를 쓰는 주인은 더 한심해서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이면 며칠, 혹은 몇 달, 혹은 몇 년씩 텅 비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