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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Sep 03. 2020

해외여행 말고 동네 여행 2

02_'슬리퍼' 신고 산책하기


1-1 느린 산책


집에서 나와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아득한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 든다. 우리 집은 6층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집만 드나드는데도, 쉼 없이 올라가고, 내려와야 한다. 땅을 본격적으로 다지기도 전에 지칠 만큼 체력이 약해졌나 보다. 그동안 나를 돌보지 않은 게 확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시작하기 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플러스 점수를 주며 나를 다독인다. 시작부터 꽤 잘 해내었다고.


작년 여름에 언니가 슬리퍼를 몇 개 보내주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운동화나 해지고 답답해 보이는 신발만 신고 다니는 게 마음이 안 좋았나 보다. 오늘은 무거운 워킹화 대신 언니가 보내준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다소 위험한 선택이긴 하지만 나는 오늘 뛸 일이 없다. 그러니 슬리퍼 좀 신어본들 어떠랴.


올라가다 보니 ‘안골’의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하천길.


오늘의 날씨는 맑다. 전날 비가 왔는데 햇살에 비친 이슬방울은 자연을 보석으로 만들어준다.


이 길을 만나게 되면 본격적으로 땅을 디디는 일이 시작된다. 날씨가 좋으면 갯지렁이나 하천의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왜가리도 보고 고라니의 발자국도 볼 수 있는 곳. 고라니 때문에 과일을 키우는 농장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고라니 조심!’이라는 빨간 경고성 글씨도 보이지만 심드렁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그저 생계에 위협을 끼치는 농장 주인들의 심상찮은 경고문구를 벗 삼아 계속 걸었다.


전날 비가 많이 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흙이 발을 더럽힐까 고민되지만 계속 걷는다. ‘안골’의 중심부가 나올 때까지.    


안골에 들어서자 나를 반겨주는 나무들

걷다 보니 안골에는 푸른 잎을 뽐내는 나무들이 빼곡하다. 밟고 있는 흙은 포근한 냄새를 풍기지만, 촉감만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항상 시멘트가 있는 곳에서 살아가다 보니 약간 말랑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변화무쌍한 흙의 느낌이 낯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드러운 흙에게서 반대로 뭐라 설명하기 힘든 단단함도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멘트에 무릎이 깨졌는가


 도시의 시멘트는 겉모습은 단단하지만 넘어지는 순간 사람을 너무 쉽게 상처 입힌다. 살아가면서 나는 그 바닥에 넘어져 무릎이 얼마나 많이 깨졌던가. 살아가면서 시멘트 바닥 같은 삶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남겼던가.


그럴 바엔 조금 물렁하고 찐득해도, 때론 축축하고 음습하기도 한 흙길이 더 좋다. 흙에서 넘어지면 그래도 시멘트보다는 덜 아프겠지. 지저분해지겠지만, 대지에 나라는 뿌리를 하나 박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입구에 다다르기 전, 경계선처럼 나뉜 곳을 무심히 넘어가다 보면 이렇게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줄줄이 서있는 나무들이 이방인을 반겨준다. 가문비나무, 길가에 늘 푸르게 서있는 상록수들. 색색의 여름 꽃들. 같은 동네를 벗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에게 나는 아직 이방인이다. 자주 주시하곤 하지만 직접 밟아본 적은 없으니 나는 아직까지 새겨진 것이 없다.


발에 자박자박 밟히는 잎의 소리가 좋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아로새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것이 자연이라면 나는 더 황홀하다.


나는 잠시 일찍 떨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행복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슬리퍼를 달달 끌고 그저 묵묵히 걷는다. 하천의 물줄기를 보고, 청개구리가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보고, 벌레들의 시체를 보고 기겁하기도 하면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섭리대로 흘러가는 것들이다.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안골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끝이자 시작점. 이곳에서는 하천의 물줄기가 산에서부터 콸콸 쏟아져 나온다. 힘찬 물줄기를 보니 계곡에 온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든다. 모든 근심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개운해진다. 주변에는 운동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반환점 삼아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회전하는 구간이다. 끝이자 반환점을 도는 구간. 나는 모든 근심을 끌어안고 왔다가 이 곳을 시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제는 비워진 내가 있을 뿐이다.



가는 길에 여름을 만났다. 땀으로 흠뻑 샤워를 한 뒤, 돌아오는 길에 시원한 바람을 만났다. 방향에 따라 강렬한 햇빛이 뒤따라오다가 이제는 햇빛을 등지고 시원한 바람길을 따라 걷는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가장 재미있게 노는 방법은 느리게 걷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 순간 또 한 번 여름이 되었다.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니 오늘 막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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