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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Sep 15. 2020

가끔 준비 없이 떠나는 것도 괜찮다.

가진것이라곤 쌩얼과 kf94마스크




계획을 세웠던건 아니었다. 그저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고 나서 집에 다시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처음과 다르게 계속 번복됐다. 처음에는 속으로 ‘동네 우체국, 그다음에는 옆 동네 다이소에 가서 홈카페 세트를 사고 올리브영 가서 향수 사야지. 짐이 무거울 테니까 차를 끌고가보자.’ 했던 것인데, 물건을 다 사고 나니까 시간은 오전 열 한시가 채 넘지 않은 시각이었다. 아직 출근 전까지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니까 곧바로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드라이브를 짧게 다녀올 만한 곳을 검색해보았다. 그러니 ‘창포마을'이라는 곳이 스마트폰 화면을 차지했다. 마산 진전면안에 있는 해안가. 차 안에서도 충분히 짧은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라는 블로그 추천글이 많은 곳이었다.


'아 근데 머리도 안 감았고, 화장도 안 했는데... 노트북이랑 휴대폰 배터리도 안 들고 왔고.'


문제점은 따로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생각해보니 준비하고 온 여행이 아닌 만큼, 아무것도 챙겨 오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노트북과 휴대폰 충전기, 에어 팟. 읽고 있던 책 등. 아무것도 수중에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날 것 그대로의 얼굴과 항상 쓰고 다니는 kf94마스크뿐.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가자. '


나는 몇 번을 되돌아갈까 망설이다가 그냥 계속 액셀을 밟았다. 사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신경을 쓰는 것인가.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고 제대로 된 정신과 몸뚱이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 나 자신은 그걸로 됐다. 노트북과 폰의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지만, 차에 내장되어있는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길 잃어버릴 걱정도 없고 글은 나중에 써도 되잖은가 싶어서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나에겐 아까 다이소에서 사 온 메모장과 볼펜이 있다. 배터리 사정이 정 부족하다 싶으면 메모장에다 꾹꾹, 오늘의 여행일기를 적을 심산이었다. 나의 시선은 오히려 타자를 치는 것보다 손으로 써지길 바랐다.


책은 다행히 한 권씩이라도 꼭꼭 챙겨 다니는 습관 덕분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 책만 있으면 된다.

나는 계속 길을 따라 달렸고 30km를 건너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창포리에 도착했다.





창포마을은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코로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이젠 어딜 가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간간히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들과 조우할 뿐이다. 차들은 풍경을 감상할 새도 없이 앞으로 쌩쌩 나아가기 바쁘다. 참. 여기 적힌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여유롭게 바다를 눈에 담고 싶은데, 운전하는 도중에는 그러기가 정말 힘들다. 거북이처럼 간다면 뒤차가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들 것이다. 더 가면 아예 멈춰 서지 못할 것 같았다. 바다를 보며 걷고 싶어서 잠시 씨유 편의점 앞에 차를 대고 해변가를 걸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윤슬 거리는 금빛 조각들이 바다 위를 넘실거리는 모습이 참 예쁜, 그런 동네여서 그곳의 바람을 꼭 쐬고 싶었다. 차 문을 열고 동네 사람인양 슬리퍼를 끌며 해안가를 따라 걷는다. 코 안으로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한 바다 냄새가 차올랐다.




돌이켜보면 내가 참 대견해지는 일이 있다. 운전을 하고 나서 내 삶의 반경이 참 많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엑셀에 발을 올릴 줄도 모르고, 교통사고 트라우마까지 있었던 터라 차를 운전하는 내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완전히 퍼펙트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 년 전의 모습에 비하면 김해-창녕-부산-창포마을로 넓혀진 내 운전 스펙트럼에 혼자 자축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대견한 거다. 다른 일로 볼 일을 보고 나오는 길에 이렇게 먼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변화라고 할 수가 있겠다. 집과 일, 그리고 주변 시내 풍경밖에 모르던 내가 어떻게 오늝처럼, 평생 알지도 못했을 뻔한 관광지에 와보고, 다시 볼 수 있는 바다를 만들어가면서 드라이브 리스트에 하나씩 다녀온 곳을 적어놓을 수 있었을까.

비록 코로나 때문에 먼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차가 있어 감사하다. 운전을 할 수 있어서 날마다 감사하다.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여행할 수 있게 된 능력과 자기만의 방이 하나 더  생기게 된 것이 좋다.


가끔은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짧은 여행도 충분하게 긴 여행이 될 수 있다는걸 오늘에서야 배웠다. 가끔은 오늘의 나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나도 괜찮을 것 같다. 지켜야 할 것만 지킨다면 말이다. 충전할 것이 없고,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 어느 곳이든 정말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면 더더욱. 앞으로도 끝없이 도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만나게되는 아름다운 자연을 몸 한가득 뿌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저절로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그 때쯤이면 아마 코로나도 종식되겠지. 바라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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