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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Dec 01. 2020

환기

내가 제일 야박해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겨울에 굳이 야박해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바로 환기를 하는 일이다. 봄부터 여름 동안에는 창문이 열려있으니 환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는데,  유독 겨울에는 조금 더 신경 써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평소보다 집 안 창문을 더 활짝 열어 환기를 한다. 환기라는 행위를 하고 나서 코를 훌쩍이면서도 그 시간을 놓칠 수가 없도록 중독된 것 같다. 왠지 가혹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끝까지 코가 떨어져 나갈 듯 추워지고 나면 그제야 하루가 시작됐다는 느낌을 체감한다.  그 어디서라도, 창문만 있다면 가장 추운 날 창문을 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눈을 뜨고 일어나는 시간이 주로 4시 반에서 6시 사이라, 눈뜨면 주변이 아직도 어둑어둑한 밤 같은 새벽에. 어두워지는 건지 밝아지려고 짙은 건지도 모를 그 몽롱한 시간에 역시 일찍 출근하는 엄마와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고 나면 뭔가가 갑갑한 마음이 생겨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곤 한다. 공기도 고여있으면 썩는다는 썩은 이론을 설파해가며 말이다. 추워 죽겠는데 무슨 망할 놈의 환기냐며 문을 닫는 엄마와 아옹다옹 다툼을 하다 보면 엄마의 출근시간이거나, 나도 같이 출근하는 시간이 온다.
 
엄마와 출근시간이 다른 날에는 환기를 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엄마가 공간 차지한다고 싫어하는 커피머신을 주섬주섬 꺼내와서 멀티 콘센트를 꼽고 나서 뜨거운 커피를 내려마시고,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좋은 문장이 담긴 책들을 한 페이지씩 읽는다.  몸 안쪽 구석구석까지 깨우려고 인센스 스틱을 피우거나 사놓은 꽃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좋아하는 채널의 캠핑 영상을 보면서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부산스럽게 이 방 저 방, 다니다 보면 비로소 해가 충만해지는 시간이 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인 일곱 시와 여덟 시 사이의 그 시간이, 그 풍경이 나에게 오는 것이다.

환기를 하다 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정확하게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환기했을 때 보이는 것들이다.  창문을 열고 닫는 사이에 미처 돌보지 못했던 것들의 처참한 죽음이나 너무 과해서 죽은 것들, 물만 주면 자라게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바쁘다는 핑계로 물만 주고 공기에 신경 쓰지 못했던 순간들을, 그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것을 늘 베란다에 나와있는 식물들에게서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임이랑 작가는 책에서 식물을 죽이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거기까지 쿨하지 못한다. 아마 시간이 흘러도 그럴 것 같다. 뭐든 죽은 것들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 늘 후회와 미련이 생긴다. 특히 겨울에는 모든 것이 다 혹독하다. 늘 신경 쓰지 못하고 보내버리고 나서 급하게 잔해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말라서 죽은 것들은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고, 과해서 죽었던 것들은 분명 환기에 소홀했기 때문이리라. 공기도 통해야 하는데, 물을 말려줘야 하는데, 너무 창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겨울은 이래서 간과하기가 쉽다. 차가워서 상하지 않을 것 같고, 가만히 있어도 추울 것 같아서 창문을 꼭 닫게 만든다. 찬 공기든, 더운 공기이든, 물이면 흘러서 말라야 하고 마른 물들이 다시 공기가 되어 비로 내리는 그런 순환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차단해버리려고 하니까  곰팡이가 쉽게 생기고 뭐든 죽이기 쉽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공기의 탓도 있다. 그러니까 겨울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겨울이 훑고 간 공기에 집 안이 상쾌해진다. 하룻밤 사이 묵은 것들을 보내고 난 뒤 집은 가볍다. 여덟 시를 지나면 햇살이 있어서 공기는 그나마 좀 포근해진다. 그때 창문을 살짝 닫는다. 사람도 대화도, 공기도 뭐든 흘러 다녀야 명확해진다는 사실을 환기로 깨닫는다. 그러면 생각도, 몸도, 사람을 감싸고 있는 하루도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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