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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Jan 02. 2024

‘완벽히’ 망한 하루

그래도 완벽한 거잖아?

책이 읽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섰다. 살짝 삶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일까. 욕구가 생기다니.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까지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세수를 하고 엷게 톤업크림과 립글로스를 바르곤, 버릴 물건들을 손에 들고 나와서 버리기 시작한다.


 버릴 물건들을 챙기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미처 해결하지 못한 라면국물이 책 위로 쓰러졌다. 아, 그거 중고도서 매장에 들고 가서 팔까 말까 한 건데.. 이제 팔지도 못하게 생겼군. 하, 하루 차이로 환급받지 못한 영어 인강도 그렇고 지난번 매장에 중고도서로 판매한 도서가 제 값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것을 보고는 한참을 짜증 속에 있었다. 내 잘못으로 이루어진 일이긴 했지만 구래도 눈 뜨자마자 한꺼번에 우수수 불행을 통보해 주다니 너무하잖소. 나도 그런데, 연휴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직장인들의 업무는 또 어떠할까. 생각해 보니 머리 아프다. 아마 연휴 때라고 참고 참은 모든 문제와 계획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곤 했겠지. 의사가 출근한 병동도, 그날 업무를 시작한 간호사들도 부산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지난번 특별 도서 대출기간 때 빌린 책 두 권을 반납하자. 그리고 읽고 싶었던 책을 빌려오는 거야!

계획은 야심 찼다. 매년 갱신해야 할 서류도 출력하고, 스캔하고 한꺼번에 하면 되겠다. 그런데 가만 보자, 지갑이 어디 갔지. 으악 커피 쏟았네. 휴지가… 아 이러다가 갈 수 있을까. 버스가 오는데. 버스가 오는데. 일단 올라탔다. 시간에 맞춰서 타기는 성공. 주변의 화려한 볼거리도 스킵 성공했다. 이렇게 주의력 있게(?) 도서관까지 오는 건 오랜만이다.


그러나.


책을 놔두고 왔다^^


혹시나 내 눈이 잘못된 것 아닐까. 싶어서 한참을 뒤적거렸지만 반납하려고 챙겼던 책은 들고 오지 않았다. 빼놓고 나서 그대로 몸만 와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가방이 무겁다며 낑낑 대며 온 나였다. 역시 정신은 신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맞았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의식적으로 챙겼다고 강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주변의 온갖 것들에 신경 쓰면서, 이상한 곳에 한번 꽂히면 시야가 좁아지는 탓이다.

 난 여기 올 때까지 무엇 때문에 힘들었던 건가. 혹시나 내가 책을 다른 곳에 놓고 온 것은 아니려나. 싶었지만 손에 들고 온 기억이 없다. 잠시 동안 도서관 정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허무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보고 싶었던 책은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신간 코너에 가서 봐도, 청구기호를 두 바퀴 걸어도 없다.

다시 도서관 어플에 들어가 상태 확인하니 대. 출. 중이라는 단어가 선명히 떠오른다. 아. 오늘 뭐가 잘 안 되려나보다. 아니지 아직 새해야 이런 말 하면 부정타. 퉤퉤. 해보지만 짜증 나는 마음을 이루 달랠 길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헛헛한 마음을 안고 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다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설 한 권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을 펴고 읽었다.


그런데 왜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펼치면 배가 고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기분도 습관이라며 애써 참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의 젊은 시절이 담긴 여행 수기가 펼쳐진다. 대체 얼마큼 돌아다니고 느끼면 이렇게 술술 써지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한 장 넘기자. 그냥 쓴다.라고 간단히 답해버리는 작가다. 그래,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 속에서 풀어내고, 다시 접히는 존재였지. ‘자 이제 더 듣고 싶으면 다음 신간을 읽어보도록 해.’ 하면서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라져 버리는 그야말로 비밀 존재들. 나머지 소설도 읽다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문체 내 스타일, 이 작가는 한때 내가 사용하고 싶었던 이름을 쓰는 작가라서 더 눈길이 갔다. 내가 그 이름을 썼으면 어땠을까? 어울렸을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하다가 이름이 같더라도 인생은 매우 다르니까, 그래도 다른 이야기를 썼겠지. 생각한다. 다음날 꼭 반납하러 와야지, 하며 빌리고 싶은 책 두 권을 기억해 놓고, 나머지 한 권은 대출예약, 또 다른 한 권은 1월 희망 도서로 신청했으니 기다리자. 바로 옆에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지만 판타지 문학은 길게 읽는 편은 아니라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한다. 눈 깜빡할 사이에 2023년을 보냈는데, 20일쯤이야 눈 반쯤 감으면 다가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것도 연습이니까. 기다려본다. 기다리면 돌아올 것은 다 돌아오고는 했으니까. 믿으니까. 잊고 있다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 다시 돌아오는 행복을 믿는다. 그저 소설을 완성시키는 마음으로 작품을 쓴다는 하루키처럼 나도 하루를 그저 ‘쓰자고’ 생각한다. 나의 하루는 , 대단할 것 없지만 타인의 삶과 다르고 내 인생은 그 자체로 문장이 될 것이니까. 나는 내 인생여행의 상주적 여행자이니까.



도서관을 나와서, K점 스타벅스로 향하는 길에 서점에서 책을 구경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키의 먼 북소리가 있나 싶어서. 그러나 없다. 이것마저 다행이다.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나는 내일 새로운 책을 볼 수있는 설레임을 기약할 수 없었겠지. 또 그렇게 한 철, 뭐든지 빠르게 손에 잡히는 대도시의 편리함에 조용히 침묵하면서, 계획한 하루 전날, 설레며 잠드는 전야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겠지. 계획대로라면 완벽히 망한 날이지만그래서 행복했다. 그래도 어쨌든 완벽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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