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aily gl grim
Feb 01. 2019
멋진 야경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노을 속 분위기에 취해 낭만을 만끽하다.
먼바다를 보며 청춘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다.
이 오글거리는 글은 모 여행 관련사 광고 문구다.
하지만 여행은 어느 정도 찌질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짧디 짧은 여유와 가냘픈 통장잔고 그리고 여행의 합목적에 대해 내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거쳐야 실행 여부가 결정되는 생각보다 골치 아픈 작업이다.
게다가 이런 이유로 여행이 싫다고 선언하면 도전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 싫어"라고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단순히 싫어함에 그치지 않고 왜 싫은지 솔직해지면 더 좋겠다.
사람들이 극찬해오던 신성하면서도 아름답고 인생의 종착역이자 목표이며 버킷리스트이자 만능키인 여행을 두고 바드득 날을 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준비단계에서의 찌질함.
여행을 결정하고 준비하면서 겪는 수많은 골칫거리와 귀찮음이 여행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데 관문에서부터 스트레스와 결정장애를 겪게 된다.
예를 들어 방콕에 간다고 해보자. 먼저 방콕의 베스트 계절과 나의 휴가를 맞춰야 한다. 겹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상사의 휴가날짜를 알아내고 바쁜 일정을 피해 눈치를 잘 살피다 보면 가능한 일정은 우기에 태풍이 잦은 계절이고 만다. 하는 수 없이 천지신명께 빌며 날짜를 점지해야 한다.
이 일정에 맞는 저렴한 방콕행 비행기를 알아보려면 수많은 여행사나 항공사에 가입하고 가격을 비교해야 한다.
항공편을 구하고 나면 이번 여행의 컨셉도 잡아야 하고 어디에서 자고 어디에서 먹을 건지 동선은 어떻게 짤 건지 이동수단은 어떻게 할지. 방콕 전문 커뮤니티나 카페를 최소 5~10시간은 뒤지고 분석해야 한다.
우리는 패키지여행이 전부였던 부모님 세대와 다른 자유여행 세대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남들과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나만의 동선을 짜야하는 것도 포함하자. 남들과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 물론 내 얇은 지갑이 허락하는 한에서..
슬슬 고작 3일 길게는 7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가려고 내가 투자하는 수많은 돈과 준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인스타에 올려서 남들에게 자랑해야 할 그 중요한 순간들을 상상하면서 버텨내자.
젠장. 꽉꽉 채운 일정으로 이번 여행은 휴양으로 정했지만 더 이상 휴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2. 도착하자마자 찌질함.
드디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전날까지 야근시킨 사수 새끼에겐 면세점에서 제일 싼 초콜릿이나 사다 주리라 다짐하며 수완나품 공항에 내린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또 얼마나 찌질한가.
끊임없이 최저가를 비교하며 산 LLC 항공편을 타고 새벽 도착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면 도심까지 이동하는 택시기사가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구글맵과 미터기를 번갈아 두 눈을 고정한다. 아차 방콕에서는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다는데? 인천공항에서 환전할 때 잔돈으로 바꾸지 않은 게 내심 맘에 걸린다. 룸미러로 자꾸 뒤를 살피는 이 택시기사가 찝찝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혹시 먼 길로 돌아가진 않을까 하면서 연신 휴대폰과 택시기사 뒤통수를 노려보느라 도시의 첫인상 따위를 즐길 여유는 없다. 역시 전전긍긍하며 신경이 곤두선다.
3. 여행지에서라고 다를까?
사람 사는 건 다 찌질하다. 나트륨을 끊임없이 섭취해줘야 하는 우리 인간은 어떤 방면에서도 짠내와 찌질함을 생산해낼 수 있다. 여행은 구매력으로 경험을 교환하는 기회비용의 극치다. 의미부여 없이는 쓸모없는 소비활동이 될 수도 있다.
멋진 야경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멋진 야경을 두 눈에 보고야 마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 되며,
먼바다를 보며 청춘과 인생을 생각하기보다는 낮에 먹은 음식점에서 예산 오버로 주머니엔 얼마가 들었을까? 가 쉴 새 없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내가 이 돈으로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을까'의 비리고 짠 전쟁이다.
호객꾼과 관광객을 노리는 장사치들의 포화를 뚫고 저렴한 기념품을 득템 하고서도 자기 전에 아끼고 아낀 유심칩 인터넷으로 남들은 얼마에 샀는지 검색을 해야 안도감이 든다.
내가 가진 유한한 시간과 돈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꼬깃꼬깃 손에 쥐고 최선을 다해 즐기기 위해 찌질거려야 '성공적인 여행이었어' '이만하면 만족스럽군'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래야 머나먼 미래에 이번 여행의 추억이 '꽤 괜찮은 추억'자리에 등극할 수 있으니까. 이 시점에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라는 틀에 박힌 상용 문구를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꽤 괜찮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며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뻘글을 쓰는 내게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만간 떠날 다른 여행지에 들어갈 예산 때문에 일주일째 머리가 지끈지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