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계절이 지나면 사라질지 모를 바다의 귀족
창밖의 바람이 부쩍 차가워졌음을 느끼는 날이면 주방의 식탁 위에도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손님이 찾아옵니다. 바로 '바다의 귀족'이라 불리는 도미입니다.
사실 도미는 사계절 내내 우리 곁에 있는 듯하지만, 찬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는 지금 이 시기만큼 그 맛이 정점에 이르는 때도 없지요.
수온이 내려가면 도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몸 안에 깨끗한 지방을 축적하고, 차가운 바다를 견뎌내느라 근육은 더욱 쫄깃하게 수축합니다. 가끔은 인생도 고난을 겪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듯, 도미의 육질 역시 가장 추운 시기에 가장 빛나는 식감을 선물해 줍니다.
특히 남해의 거친 물살을 견딘 자연산 도미를 마주할 때면, 그 탄탄한 생명력에 경외감마저 느껴지곤 합니다.
도미의 매력은 붉은 껍질 속에 숨겨진 눈부시게 하얀 속살에 있습니다. '백어(白魚)'라는 별칭처럼 그 살결이 어찌나 고운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이 들지요.
무엇보다 지방 함량이 낮고 단백질이 풍부해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기 쉬운 요즘 같은 날씨에 참 고마운 식재료입니다.
100g당 약 20g이나 되는 양질의 단백질은 소화가 잘 되어, 식사가 조심스러운 노년층이나 기운을 차려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영양 공급원이 됩니다.
여기에 체내 나트륨을 배출해 주는 칼륨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칼슘, 아연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바다가 준 종합 영양제라 할 만합니다.
유독 몸이 무거운 날, 도미 요리 한 접시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지친 신경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기분 좋은 활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미가 예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건 비단 그 맛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도미를 '상어(上魚)', 즉 으뜸가는 생선이라 부르며 아꼈지요.
특히 붉은빛이 선명한 참돔은 복을 부르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길조의 의미를 담고 있어, 집안의 큰 경사나 소중한 분을 모시는 잔칫상에 결코 빠지지 않았습니다.
기름지지 않으면서도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깊은 단맛은 선비의 절개를 닮았다고 하여 제사상에도 정성스레 올랐지요.
화려한 겉모습 속에 담백한 내면을 지닌 도미를 보며, 우리네 삶도 너무 요란하지 않으면서 깊이 있는 맛을 내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시장에서 도미를 고를 때는 마치 오랜 친구를 살피듯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눈이 투명하고 맑게 반짝이며 톡 튀어나와 있다면 아주 신선하다는 증거입니다.
아가미는 건강한 생기가 느껴지는 선명한 붉은빛이어야 하고, 살을 지그시 눌렀을 때 탄탄하게 되튀어 오르는 힘이 느껴져야 하지요.
비린내가 아닌 시원한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녀석을 골라왔다면, 이제 그 본연의 맛을 깨워줄 차례입니다. 소금을 살짝 쳐서 중불에 천천히 구워내면 살이 퍽퍽해지지 않고 촉촉함이 살아나고, 무와 다시마를 넣어 간장에 졸여내면 근사한 조림이 완성됩니다.
특히 젤라틴이 풍부한 머리는 버리지 말고 맑은 탕으로 끓여보세요. 뽀얗게 우러난 국물 한 모금이 차가운 몸을 녹여주는 따스한 위로가 되어줄 테니까요.
도미 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유자즙을 살짝 곁들이면, 입 안 가득 산뜻한 감칠맛이 퍼져 나갑니다. 화려한 양념 없이도 식재료가 가진 힘만으로 식탁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 도미의 힘은 참 대단하지요.
면역력이 떨어지기 쉬운 이 계절, 나 자신을 위해 혹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정성껏 도미를 조리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저녁, 제철을 맞아 가장 고귀한 맛을 품은 도미 한 마리로 식탁 위에 작은 잔치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오늘 한 번 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