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랑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그때 나의 눈에 아빠는 너무나 보수적이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었다. 원만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기 어려웠던 아빠에 대한 반발심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정말 어렸을 때, 그때는 아빠를 굉장히 좋아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유치원 시절에 엄마가 찍은 VCR 영상을 본 적 있는데, 그때 나와 동생이 아빠 옆자리를 독차지하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었다. '아, 저런 때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니 아빠만 찾던 딸이 다 커서 아무렇지 않게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을 보며, 안 그래도 감수성 풍부한 우리 아빠는 많이 속상하셨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유학길에 올랐고, 방학이라 한국에 들어가도 친구들을 만나 시간 보내기 바빴다. 주말에 아빠랑 둘이 집에 남아있노라면 할 얘기 없이 TV만 보다가 어색하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던 어쩌면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빠에 대한 오해가 많이 풀리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끝내고 휴학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한국에 돌아왔고, 당시 사비를 털어 병원에 다니며 약을 처방받고 있었다. 물론 나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다. 다만 무척이나 예민한 상태였기에 모든 부분에 날이 서있어 부모님과 부딪히기 일수였다. 등을 돌려버린 나를 보고 엄마는 상처를 받았고, 이를 본 아빠가 화가 나서 내게 한 마디 하셨는데 그때 모든 게 터져버렸다. 참았던 이야기들을 쏟아냈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아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아빠는 위로 누나들이 많은 집의 막둥이였지만, 딸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잘' 하는건지 몰라서, 아직도 노력하고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이었다. 아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듣게 된 건. 그리고 아빠도 '아버지'의 자리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또 달라져버리는 아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대화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우리 아빠가 상위(?) 1%의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됐다. 토요일에는 헬스장을 갔다 와서, 빨래를 하고, 옷을 개고, 일요일에는 회사에 입고 갈 셔츠를 직접 다리신다. 주말에는 아빠가 요리를 하고, 기념일에는 쿨한 엄마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사들고 오셨다. 어릴 때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오는 마카롱, 초콜릿, 곰인형을 받아왔다. 업무에 치여 입술 옆에 다 터지고, 만성 허리 통증에 괴로워 하시면서도 아빠는 쇼핑을 하고 돌아온 여자들(엄마와 두 딸들)을 보면서, 이걸 보는게 행복이라 계속 일하는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빠 같은 남자는 이 세상에 없어서 못 데려오니깐 나중에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빠는 젊을 때 돈이 없어서 엄마 고생 많이 시켰다며, 아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