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자식과의 이별일기.
그자식을 만났다.
우연히는 아니고,
뭐 어떻게 그냥 내가 연락해서 만났다.
사실 아직도 멍해서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굳이 써야 하나 싶기도 하고 별로 쓰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데 더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기억이 나는 대로 쓴다. 그냥.
나를 만날 때 늘 까까머리를 유지하던 그자식은 머리를 길러 잔디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제 머리 기르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슬 추워지니 기르는 거라고 했다.
헤어진 3개월의 시간을 걔의 머리 길이가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지만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걔가 신기해 쳐다보기 바빴다.
시답잖은 이야기 몇 마디를 주고받다 걔가 건넨 말은
- 근데 너 지금 어색해? 나 정말 하나도 안 어색해. 우리 어제도 만난 것 같아.
나의 대답은
- 아니. 나도 그래.
어색하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서 종종 정적이 흘렀다.
오는 길에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떠올렸는데 정작 눈앞에 앉혀놓고 나니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 걔가 틀어둔 장작불이 타오르는 화면에 가사 없이 잔잔한 음악만 적막을 채우고.
그냥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꾹 꾹 참느라 바빴다.
애써 참아봤지만 걔가 안아서 달래주니 눈물이 더 터져 애기처럼 울어버렸다.
기억에 남는 대화들은.
너를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위해 나는 혼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것을 위해 친구들과 같이 꾸려가고 있는 (심지어 잘 되고 있는) 사업에서도 손 떼려다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는 걔의 말.
- 너 나 다시 만날 생각 없다면서 왜 나 안아주는데?
- 너는 나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었어.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어? 하는 나의 질문에 걔의 대답은.
- 그냥. 그냥 안아준 거야.
- 음. 여자친구.. 였지.. - 어떤? - 그냥.. 여자친구..
그냥. 그냥이라는 말에 그냥 알겠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이 나는 별 의미 없이 한 행동이고 너는 별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 의미부여 하지말고. 대답했으니까 이제 됐지?라는 뜻인 것 같아 집에 와서 또 한바탕 울었다.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서 페이스아이디 인식도 안 될 정도로.
그자식은 내가 살아온 이십몇년의 시간 중 짧은 시간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말을 했더니 걔는 앞으로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런 기억들은 더 많을 거라고 했다. 그렇겠지. 사실 내가 받은 영향에 비해 나는 걔에게 고작 그냥이었다는 거 때문에 슬퍼진 것 같은데. 어차피 이젠 무슨 의미가 있었더래도 의미 없는 사이인데. 그냥, 뭣도 아닌 그 말에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