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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Nov 19. 2019

잊지않고 기억해야 할 여성독립운동가 10인

선조들의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잠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 4천여 명 중 여성은 1.9%인 272명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고, 군수품을 운반하는 등 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여 기록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의 업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애라


이애라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평양에서 3.1 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구류된 인물이다. 수원, 공주, 아산 등 지방교회를 순회하며 비밀리에 부인회를 조직한 후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은 서울에서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빼앗아 타살하고 부인을 체포 연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에 이규갑 씨가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하였다.

윤희순


윤희순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이며,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돕고 직접 군사훈련에 참여한 최초의 여성 의병이다. 1910년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가족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12년 운영자금을 모금하여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설립하고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돌며 반일 선전과 모금활동을 이어나갔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죽고, 2년 뒤 남편이 죽었지만 두 아들 돈상과 민상을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시킨 뒤 뒷바라지에 전념하다가 1935년 아들 돈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끝내 숨을 거두자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삶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정리한 후 곡기를 끊어 1935년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남자현


1919년 3.1 운동 때 중국 둥베이 지방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하여 전달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또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 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쓴 것으로 알려진다. 1933년 일본 장교 무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고, 옥중에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순국하였다.

김락

사진 : 경상북도문화콘텐츠진흥원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도사를 지낸 진린의 딸인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안동의 예안면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아 실명하였고, 남편과 두 아들 동흠, 종흠의 항일 투쟁을 귀로 전해 들으며 고통 속에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락의 남편인 이중업은 파리장서사건 때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탄원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권기옥


독립운동가 권기옥은 평양 숭의학교 졸업반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3주일 동안 구류되었고, 그 후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안창호 등과 활동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마리아


한국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19년 귀국, 황에스터와 함께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체포되었다.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상하이로 탈출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귀국하여 1935년부터는 마르타 윌슨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생을 그리스도교 전도사업과 신학발전에 진력하였다.

황에스터


황에스터는 1910년 이화학당 졸업 후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애국비밀결사대인 송죽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또 1919년 3.1 운동으로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투옥되자 옥중 지사와 그 가족을 도울 목적으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총무를 맡아 의연금을 모집하고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한 후 가출옥 한 후, 1920년 남편과 함께 중국 하얼빈으로 가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1952년 귀국해 전쟁미망인과 고아의 기술교육을 위한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정정화

사진 : 국가보훈처


한말의 독립운동가인 정정화는 3.1운동이 일어난 후 시아버지인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자 자신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으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밀사를 맡았다. 1920년 비밀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연통제가 폐쇄되자 야음을 이용해 압록강을 건너 밀사 역할을 수행했다. 임시정부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칭송을 받았다.

박차정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박차정은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고 그해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의열단 기관지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추구하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이듬해 2월 장쑤성 쿤룬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사망하였다.

오광심

사진 : 국가보훈처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오광심은 1931년 조선혁명당에 강비하여 유격대 지항연락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 부녀부 차장으로, 1936년에는 대한민국대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제3지대장인 김학규와 함께 제3지대 간부로 광복군 선전 활동을 담당하여 초모, 선전, 파괴 등의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광심의 남편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학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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