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초라해서, 자네를 떠났네.
우리동네 나의손주
나는 이따금씩 자네를 추억하네. 자네와 함께 갔던 저수지를 기억하고, 그날 함께 먹었던 도토리묵과 백숙을 잊지 못하네. 비만 오면 고장 나던 자네의 무릎을 걱정하고, 자네가 여전히 꽃잎으로 화전을 부쳐 동네사람들과 나눠먹기를 즐기는지 궁금하다네.
여전히 자네는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자기 일이 아니어도 크게 울며 살아가고 있겠지. 크고 작은 마음을 아끼지 않던 사람, 모든 순간에 모든 감각을 쓰던 사람, 자네는 그럼 사람이었지. 덕분에 자네 옆에 있으면 생생히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네.
내가 가족이라 여기던 사람들을 모두 잃었을 때도 자네는 큰 마음을 주었다네. 잘 잤는지, 잘 먹었는지, 행여 울고 있진 않을지 걱정하며 살뜰히 나를 챙겼지. 그런데도 자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 숨어버렸어.
자네를 미워한 게 아니네. 맹세컨대 단 한순간도 자네의 불행을 바란 적 없어. 나는 항상 자네가 그 큰 입으로 큰 웃음소리를 내며 살아가기를 바라네. 다만, 자네 앞에 선 내가 너무 초라해서, 너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네. 자네와 나란히 걸어도 자네는 저 앞에, 나는 저 뒤에 걷는 기분이었다네. 자네는 계속 위로를 주고, 나는 계속 위로를 받아야 하는 대화가 숨 막혔어. 온갖 슬픔과 화로 둘러싸인 나를 달래다가 자네의 모든 감각이 슬픔과 화로 도배될까 두려웠다네. 자네의 행복한 이야기 하나 들어줄 수 없는 일그러진 내 마음이 서글펐네. 그래서 나는 자네를 떠났네.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엔 집이 몇 개 없어 밤에는 혹 어둠을 덮고 눕는 기분마저 들어. 밤이 너무 어두워 모로 돌아누워 얼마간 웅크릴 때, 자네를 추억한다네. 불쑥 "언니, 이거 좀 잡숴봐." 하며 풀어놓던 자네 보따리의 음식 냄새를 추억하고, 자네와 빠글빠글 머리를 볶고 나서 꼭 사 먹던 칼국수를 추억해. 자네는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참 보석 같은 사람이었네.
자네 손주들이 커 가는 모습, 자네 행복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함께 할 수 없어 내내 아쉬워. 그저 자네만큼은 펑펑 웃으며 살아가기를, 어둠이 소복이 내려앉은 긴 밤에 깊은 마음으로 빌어본다네.
그동안 고마웠네.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님 댁에 아이들과 주기적으로 찾아뵙는 '동네손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