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해 보이기 VS 친근해 보이기
우리동네 나의손주
유능해 보이기 VS 친근해 보이기
잠시 이 글을 읽는 독자분, 둘 중에 뭐가 더 끌리시나요. 그 이유는요?
자살예방 업무 담당자 연수를 갔더니 충청북도 마음교육진흥원에서 만든 집단상담 워크북 '마음다이어리'를 나눠줬다. 마음다이어리는 아이들과 마음, 감정, 비합리적신념, 가치 등을 나눌 수 있는 총 5회기 분량의 집단 상담툴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우리 반 아이들 3명에 나까지, 총 4명이서 마음다이어리 워크북을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가졌다. 월요일 1교시마다 마음다이어리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두 번째 집단상담 시간 때, 요즘 가장 많이 드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고민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올해 6 학급 학교에서 생활안전자치 6학년을 맡았다. 이 글을 읽는 분 중 선생님이 계시다면 이미 나를 동정하게 되셨을 것이다. 3월, 접수한 공문은 100개, 올린 기안은 50개, 수학여행 준비, 학생자치 활동, 연구학교 프로젝트수업 지도안 짜기, 새 학기 학년 업무 전부 등 각종 업무에 치이고 있었다. 공문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분명히 캘린더에 적어놨는데 까먹어서 안 냈다는 독촉연락받고, 냈는데 잘 못 되었다고 정정 연락받고, 공문 쌓인 거 오후 내내 열심히 처리해서 '오, 드디어 11개의 공문을 처리했어!'라고 생각하면 다음날 다시 11개의 공문이 쌓여있는 기 적과도 같은 3월이었다.
'나는 업무를 너무 못해서 고민이야. 멍청한가 봐.'
아이들에게 고민 말하기 예를 들어주려고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요즘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애들이 너무 착하고 듬직하다 보니 마음이 녹아버려서 나는 어느새 집단상담원이 되어있었다. 서희가 말했다.
'괜찮아요, 안 죽어요.'
서희의 말을 조금 더 있어 보이게 포장하자면 '당신을 죽이지 못한 고통은 당신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혹은 '모든 건 다 지나갑니다. 별 일 아닙니다.' 정도일 것이다. 나는 서희가 툭 던진 말에 마음이 동해 비실비실 웃었다. '까짓 거 죽을 일도 아닌데, 에라이 퉤.' 마음 쭈글이에서 마음 허세꾼으로 순식간에 모드가 뒤집혀버렸다.
"선생님처럼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을 얘기해 주면 돼. 너네 고민도 돌아가면서 말해보자."
태리가 순수한 미소를 머금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저는 없어요. 진짜 없어요."
태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 없었다. 서희를 쳐다보았다.
"음.... 저는..... 음.... 뭐 딱히 고민이랄거는."
진짜 없어 보였다. 웬만한 일은 '안 죽어.'로 퉁 쳐 버렸을 얼굴이다.
2회기에서는 나만 힐링했다. 머쓱했다. 어쨌건 '괜찮아요, 안 죽어요.' 문장이 내게 남아 3월을 마저 구르는 데 큰 용기가 되어주었다.
네 번째 상담 시간은 나의 욕구를 파악하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가치 벨런스 게임이 나왔다. 그중 이런 선택지가 있었다.
유능해 보이기 VS 친근해 보이기
태리랑 서희는 지체 없이 친근해 보이기를 골랐다. 이유를 물으니 친구들에게 친근해 보이는 게 유능해 보이는 것보다 좋다고 했다. 나만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둘 다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얘들아, 나 너무 둘 다 하고 싶어. 그래서 내 인생이 피곤한가 봐."
"그래도 하나 골라보세요. 쪼끔이라도 더 끌리는 걸로."
"음........................"
끌린다기보다는 유능해 보이는 것은 좀 세련되니까, 나는 항상 세련된 여자들을 동경하니까 유능해 보이기를 골랐다.
"유능해 보이기로 간다!"
"다른 선생님들이 '김은진선생님은 일은 잘하는 데 재수가 없어.' 이래도 괜찮아요?"
"'김은진 선생님은 멍청해도 성격은 좋아.'보단 낫잖아.'
반박은 했으나, 재수 없는 이미지를 감당하며 태연할 배포까진 없는 인물인지라 단박에 세련된 여자는 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도 '멍청해도 애가 성격은 좋잖아.' 드라마 동백꽃필 무렵 노규태 이미지로 보이는 것 또한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나는 다시 두 개의 선택지 중에 아무것도 고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못 고르겠다. 둘 다 하고 싶다. 그래서 내 인생이 피곤했구나."
남한테 잘 보이고 싶은 욕구, 하나만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잘 보이고 싶은 욕구, 그 욕구들에 휘둘리느라 인생이 피곤해졌다는 걸 유레카 깨달은 시간이었다.
마음다이어리로 집단상담을 하면서 가장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나였다. 내가 봐도 우리 반 아이들은 비합리적 신념도 딱히 없었고, 고민도 딱히 없고, 추구하는 가치가 상충되어 쩔쩔매지도 않았다. 나만 그랬다. 신랑은 이 정도면 은진이가 아이들에게 상담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마음다이어리 집단상담을 함께 하며 서희의 '괜찮아요, 안 죽어요.'테라피와 남한테 다양하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인생이 피곤해진다는 걸 알아차린 후로 4월, 5월이 좀 더 단순하고 명료하며 깔끔해졌다는 걸 느낀다. 심각해질 땐 '안 죽어요.'를 떠올리고, 남한테 어떤 모습이든지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들 땐 '이러니까 인생이 피곤하지.' 생각한다.
나름 상담대학원 석사인데, 내가 얘들 힐링시켜 주려고 집단상담한 건데, 아이들이 나를 치유해 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살짝 상하기도 했고, 내가 애들을 잘 이끄는 선생님이 되려면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정서적으로 싱싱한 상태를 유지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다.
최근에 글을 많이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 영향이 컸다. 나는 내가 올려놓은 글들로 가늠되는 것이 항상 부담이었기에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올해 들어서 아주 열심히 글을 만들고 있다. 요새 올린 글들이 따뜻하거나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인 내용들이 있다 보니 내가 그런 사람인 양 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사실 내향성도 외향성도 아닌 개향성인간이다. 퇴근하면 웬만하면 사람 안 만나고 우리 집 개랑만 논다. 주로 하는 생각은 '메로나 맛있겠다.', '유모차 타고 가는 저 아이 부럽다.', '코스트코 가고 싶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각의 조각들을 글로 올려놓을 수 있었던 건 '괜찮아요, 안 죽어요.'덕분이고, 남한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 신경을 끄려는 의도된 의식 덕분이다. 모두 아이들과 집단상담을 하며 얻어온 마음의 힘들이다.
오늘의 마음의 힘 꿀팁!
1. 괜찮아요, 안 죽어요.
2.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보세요.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신경 꺼보려고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