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상근이 딸 아니냐

우리동네 나의손주

by 김Genie

-너 상근이 딸 아니냐?

-저 아랫집 상근이? 희순이 둘째 아들 동창?

-맞네, 지 엄마 얼굴 똑 닮아가지고 아주 이쁘게 생겼네.

-지난주에 음성 사는 너네 고모 왔다 갔지 않냐.

-금왕 고모요?

-그랴, 그 금왕 사는 숙자.


근 일이 주 동안 우리 반은 경로당 버스킹을 준비했다. 경로당 버스킹이란 말 그대로 경로당에 가서 깜짝 공연을 해드리는 창의적 체험활동 수업이다. 할머니들 드릴 간식을 주문해서 예쁘게 포장하고, 할머니들 기분 좋게 해 드릴 노래 공연을 준비했다. 수환이는 김연자 가수의 '아모르파티'를 라이브와 자체 제작한 안무까지 소화할 예정이었고, 태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모두 다 꽃이야.'를 부를 예정이었다. 노래 가사는 이러했다.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대로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태리가 긴 목을 쭉 빼며 우렁찬 목소리로 '모두 다 꽃이야'를 부를 때, 꽃이었을 오만가지 얼굴들이 떠올라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동네손주를 하자고 하니 '그걸 왜 해요?'라고 묻던 반골성향을 버리지 못한 서희는 제이레빗의 'Happy things'를 굳이 굳이, 기필코 나랑 같이 하겠다고 했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서희와 노래연습을 했다. 아이들 앞에서 연습할 때는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데, 경로당에선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목요일 오후, 간식을 양팔 가득 들고 경로당에 갔다. 할머니들은 경로당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시고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뜻밖의 손님이 들이닥치자 경로당엔 잠시 잠깐 당황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이내 아이들은 동네에 사는 손주가 되고, 할머니들은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되었다. 아이들은 특유의 넉살로 인사를 드리고 간식을 선물했다. 할머니들은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두툼한 손으로 아이들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우리는 준비한 공연을 펼쳤고, 할머니들은 소파에 일렬로 앉아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박수를 치셨다. 서희 때문에, 혹은 덕분에 나도 뽀글이 가발을 쓰고 오랜만에 재롱잔치라는 걸 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떠돌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랑과 애정이 별처럼 쏟아져 이마에도 볼에도 콕콕 박히는 기분이었다.


준비한 공연이 금세 끝나고 할머니들 앞에 앉았다.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셨다. 그러다 물으셨다.


-너 상근이 딸 아니냐?

-저 아랫집 상근이? 희순이 둘째 아들 동창?

-맞네, 지 엄마 얼굴 똑 닮아가지고 아주 이쁘게 생겼네.

-지난주에 음성 사는 너네 고모 왔다 갔지 않냐.

-금왕 고모요?

-그랴, 금왕 사는 숙자.


오래오래 연을 이어온 할머니들은 서희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상근이와 숙자 남매를 찾아냈다. 신니면에 시집오고, 아이 낳고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고, 손주 보고 나서도 주욱 여기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위엄이었다.


-내가 아들들 용원초 보낼 때는 학생이 700명도 넘었어. 운동회 한 번 하면 운동장에 사람이 빼곡해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이 마을이 옛날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참 많았는데 요새는 우리가 아이들 보기가 참 힘들어. 자주 와주세유 선생님.


할머니들이 타주신 미숫가루를 먹으며 신니면의 옛날을 들었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용원초등학교를 상상했다. 전교생 고작 50명의 작은 시골학교에 고작 몇십 년 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는 게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 설화라도 듣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 서희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진짜 신니면에 살기 싫어요. 우리 엄마는 왜 서울 안 가고 여기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신니면이 왜 싫은데?

-시골이잖아요.


나는 서희에게 오래된 마을에 어울려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골목 가득한 동네가 재개발로 사라지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인생에 오늘과 내일만 남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마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려다 멈췄다. 왜냐하면 나는 골목이 가득한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컸는데, 이 동네에는 같이 뛰어놀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서희와 다음 버스킹을 기약했다.


-할머니들이 또 놀러 오라고 하셨는데, 다음 버스킹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음에는 2학년 애들 데려가는 거 어때요? 할머니들이 애들 목소리 듣기 힘들다고 하셨으니까 2학년 애들 데려가면 엄청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 너무 좋아! 10월에 또 가자!


모든 게 오래된 이 마을은 오래 인사하고, 오래 안부를 물으며 연과 연이 촘촘한 거미줄을 이룬다. 나는 할머니들이 경로당에서 점심밥 함께 지어먹으며 더 오래 인사하고, 더 오래 안부 묻기를 바랐다. 다음번에 우리가 또 버스킹을 가면, 또 일렬로 앉아 함박웃음과 박수갈채를 주시기를 바랐다. 이 오랜 마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오랜 마을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시골학교에 발령 난 뜨내기 선생님은 경로당 버스킹을 하며 이 오랜 마을과 뜨내기 연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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