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규가 주말 동안 뚝딱뚝딱해낸 메뉴는 닭볶음탕과 콩나물국, 김치찌개와 불고기다. 흰 눈이 펑펑 내린 주말 동안 보글보글 끓어오른 맵고, 칼칼하고 시원한 것들과 함께 우리는 겨울 살을 찌웠다. 노하우를 전수받고자 도제식 교육받는 제자처럼 준규 옆에 서있었다. 준규가 말했다.
"이렇게 국간장을 넣고, 고춧가루를 넣고, 파를 송송 썰어 넣고, 육수명장 한 알 넣고, 간 한 번 보고, 싱겁다 싶으면 소금 넣고. 맛봐봐."
나는 빨갛게 끓어오른 닭볶음탕 국물을 살짝 떠서 후후 불어 먹었다. 입 안 가득 매콤함과 시원함이 맴돌았다.
"쉽지?"
준규가 물었다.
준규가 양념장을 탁탁 넣을 땐 쉬운 것 같기도 했지만, 맛을 보고 나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다. 몇 가지 양념을 이만큼, 저만큼 털어 넣은 것만으로도 반짝이는 닭볶음탕이 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한눈 판 사이불고기가 뚝딱 완성되는지도 영문을 모르겠더라.
준규가 만든 메뉴들이 상을 가득 채우고, 내 뱃속도 가득 채웠다. 이중창 밖엔 눈발이 날리고 시베리아 한파가 왔다는데, 집안엔 음식 냄새가 켜켜이 쌓이고 온기가 돌았다.
지난주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를 만났다. 초록색 표지에는 아이 둘이 끌고 밀며아저씨가 휠체어로 오르막을 오르는 사진이 있었다. 좋아하지 않는 류의 제목이었지만, 사진이 주는 임팩트가 강렬하여 4권의 책과 함께 집에 데려왔다. 마스다 미리의 신간 에세이, 챗GPT한테 질문 잘하게 해주는 책에 밀려 며칠 뒤에야 이 책을 폈는 데, 금방 다 읽었다. 대기업을 다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컴퓨터 회사를 일으키고, 가정을 꾸려온 과정을 담은 에세이였다.
책 말미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세상은 여전히 맑고 따스하며 감사한 일로 가득 차 있다. 당연함을 버릴 수 있다면 당연함을 버릴 줄 안다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옆에 있는 가족 애인 친구들이 더없이 소중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움과 감사함은 세상에 당연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연함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대소변을 통제할 수 없어 분변이 이불을 가득 적셨을 때 젊은 시절 이범희 씨의 인생엔 절망만이 가득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범희 씨는 여전히 걷지 못하지만 이범희 씨 마음과 인생엔 고마운 것이 가득 차게 되었다.
며칠 동안 이범희 씨 인생과 함께 한 덕인지, 금요일 아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밖은 추운데, 나의 간 밤은 춥지 않았다. 더위와 추위를 걱정하지 않고 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무척이나 감사한 아침이다.'
이번 주말(주말 부부입니다), 따뜻한 집에서 준규의 요리들로 배를 채우면서 이런 생각이 또 들었다.
'춥지 않고 배부른 주말, 감사하다.'
오늘은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책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그 유명한 '세이노의 가르침' 책 아시나요? 세이노씨가 유일하게 추천사를 써준 책이라고 하네요. 구미가 좀 당기시나요?
내용도, 문체도 무척 맘에 들었던 책입니다. 내가 이미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며 충만한 연말을 보내기에 제격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