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인들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6, p.99
저는 불안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엄청 열심히 하고도, 그래서 성취를 이룬다 하여도 일주일이나 한 달, 일 년만 지나면 다시금 불안해집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야?'
사실은 꼬박꼬박 출근하고, 따박따박 월급 받으면서도 제 눈에 성실해 보이지 않으면,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 같으면 뒤로 걷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도태되는 것 같고요,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일 끝나고 세상 행복하게 누워 휴대폰만 4시간을 보다 단순히 잠드는 일상을 무한히 즐기는 친구를 보면 태평한 마음이 부럽기도 합니다.
'쟤랑 나랑 뭔 차이인 거야? 어린 시절 양육환경?'
이렇게 생각하면 죄 없는 부모님의 상투를 잡는 것 같기도 하고요.
최근에 '코어마인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성취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롭다고, '존재로서의 가치'라는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유명 저자이자 동기부여 강사인 웨인다이어는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보다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존재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절대적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의 성취가 곧 나의 가치는 아닙니다.' [코어마인드] 지나영 지음, 위즈덤하우스, p156
그저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해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몇 명의 사람에게는 행복과 추억, 온기와 안도를 주지요. 그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그 사람만의 우주에는 일출과 일몰이, 꽃과 바람이, 가을과 봄이 찾아옵니다. 마음껏 누릴 수도 있지요.
학년앨범을 만들면서 '원하는 대로 자라렴.'이라고 썼습니다. 저희 반 아이들이 너무 좋아지니까, 더 바랄게 없어지더라고요. 성실하고 착한, 배려 깊고 책임감 있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되니 그저 원하는 대로 자라다가 언젠가 스치듯 만나면 그날 저는 또 무척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냥 아이들이 제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요.
오늘도 아이들이 제가 해보고 싶은 수업을 너무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웠습니다. 매일매일 기쁘고 뿌듯합니다. 다. 잘 키워주신 부모님들 덕분입니다. 눈이 많이 오는데 안전 운전하시고, 감기 한 번도 안 걸리는 겨울 보내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12월 첫 등교일입니다. 좋은 시절은 꼭 금방 지나가서, 헛헛하고 아쉬운 마음을 진하게 남기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한 달도 기똥차게 보내겠습니다.
요즘 우리 반이 실험실처럼 느껴집니다. 뭘 시켜도 너무 잘하니까 실험적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게 됩니다. '너희 이것도 해볼 수 있겠니?' '오호라, 제법이네. 그럼 이것도?' '4학년인데 이것까지 할 수 있겠어?'이러면서 제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실험해 보는 중인데요. 지난 금요일에도 교육실험을 단행했습니다.
저희 반은 금요일마다 다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좋아바 즉 좋았던 점, 아쉬운 점, 바라는 점을 말합니다. 협의하는 자세가 너무 좋으니까 너희끼리 딱 한 문장의 '좋아바'를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먼저 1:1로 각자 '좋아바'를 말한 뒤 협의를 거쳐 한 문장을 만들고, 다시 둘과 둘이 만나 한 문장을 만들고, 다시 넷과 다섯이 만나 한 문장을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좋았던 점은 '눈이 와서 좋았다'로 쉽게 통일이 되었는데요, 아쉬웠던 점과 바라는 점이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마무리된 축구교실이 내년에도 또 있었으면 좋겠다.'와 '교실 청소를 잘해줬으면 좋겠다.'가 팽팽해지기 시작했고, 저는 흥미롭게 관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이렇게 결론에 다다르길래 아래턱이 턱 내려갔습니다.
"축구교실에 대해 안건을 낼 기간은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아있고, 교실청소 안건은 빨리 해결되어야 하니까 교실청소를 잘해달라는 걸로 정하자."
"그래, 그러자. 축구교실은 다음이나 다다음 회의에서 말하자."
"좋아!"
내가 말한 의견으로 정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어른들도 주체하기 어려운 충동이잖습니까. 게다가 교실청소는 좀 정의적인 영역이고, 교실축구는 지극히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거였는데 저희 반 아이들은 아무도 목소리 높이거나 싸우지 않고 교실 청소를 잘해달라는 결론에 평화롭고 순탄히 도달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반이라도 4학년이 이게 되겠어?' 생각하며 언쟁을 중재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화내지 않고, 상대방의 책상을 밀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고, 멱살도 잡지 않고(TV에서 자주 보던 어른들의 협의과정) 우리 반의 이번 주 한 문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좋았고, 교실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아쉬웠고, 교실 청소를 잘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요. 우리 반을 위해 무엇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아이들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저는 성큼성큼 걸어가 교실매점 문을 활짝 열고, "성숙하고 민주적인 국민분들께 간식을 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대통령! 대통령!" 연호했고 저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양 주먹을 추켜올렸습니다. 누가 보면 진짜 대통령 된 줄.
이렇게 저의 또 다른 교육실험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감히 선언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망설임 없이 한 표를 던지겠다고요! 이런 정치인에게 우리나라 미래를 주저 없이 맡기겠습니다.
하루하루 교실이 재밌습니다. 수업이 신나고요, 뭘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호사 호사 대호사입니다. 덕분에 월요병 없이 가뿐한 마음으로 빈 교실에 앉아서 편지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