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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7. 2022

자기 계발, 그 화려한 미명에 감춰진 진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역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책을 쓰는 한국 태생의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이 문장으로 그 막을 연다.

저자는 지금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주요 질병으로 우울증, 소진증후군 (번아웃 증후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ADHD) 등을 꼽는다. 위의 신경계 질환들은 21세기 사회의 병리적인 상황을 진단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러한 진단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사람들이 비정상인 걸까, 아니면 사회가 비정상인 걸까?



정말로 아픈 것, 병리적인 것이 어느 쪽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의 비정상적인 규율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신경계 질환 환자로 치부하고 그들에게 비정상 딱지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오늘날의 사회를 과잉 긍정의 시대라고 명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번아웃 증후군, ADHD를 앓고 있는 것은 부정성 때문이 아닌,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다른 것, 이질적인 것, 해선 안 되는 것, 불가능한 것, 통제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과 반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시대였던 20세기는 지나갔다. 21세기는 사람들에게 달라지라고 말하고 개성을 찾으라고 말하며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외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가로막던 공적인 통제는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외침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불행해진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스스로를 착취로 내몰기 때문이다. 자기 착취가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가 착취당한다는 자각조차 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권리를 빼앗긴다거나 배제당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원해서 행하고 있다는 그런 자유로운 감각으로 인해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것이 바로 자기 착취. 한국에서는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타자에 의한 박탈과 배제를 통한 착취 대신 자유롭다는 감각을 이용해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착취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외부의 규율, No라는 규칙으로 통제되지 않고 무엇이든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유 아래서 움직인다. 저자는 이를 성과사회라고 부른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도록 만들기 위해 탄생했다. 타자에 의한 착취, 규율과 배제는 나를 착취하고 배제시키는 자에 대한 저항심과 반발심이 생긴다. 이러한 면역학적 반응을 초래하는 타자 착취는 곧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착취당하고 있으며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자각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착취하는 자에 대해 부당함을 느껴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착취는 그렇지 않다. 권리를 빼앗기고 박탈당했다는 느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내가 더 나아지기 위해, 더 생산성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찾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못하게 막는 일도 없으며, 심지어는 더 나아진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한 좋은 일이라는 느낌까지 들기 때문에 쉽게 착취당하는 중이라고 자각하기도 어렵다. 자기 관리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상품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으며, 더 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할 수 없음이라는 부정성 대신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개개인을 스스로 자율적인 주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가로막는 대신 무엇이든 가능하다며 가능성을 속삭이고 진입 경로를 전부 열어놓기 때문에 이는 언뜻 보면 자유로워 보인다. 가능함의 강조는 사실상 노예상태에 있음에도 착취하는 사람이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니 본인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과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고갈시킨다.



자기 계발이 가지는 파괴력은 대단하다. 흔히들 좋은 일,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계발은 사실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자기 계발은 스스로와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는 작업이다. 나 자신을 계속해서 뛰어넘어야 할 대상, 이겨내야 할 경쟁 상대로 인식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과의 전투적 적대감을 쌓아가며 어제의 나를 저주하고, 오늘의 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는 작업이다.



우리는 여기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평생을 함께 가야 하는 반려인 나 자신과 전쟁을 치러서 행복해졌는가? 나는 행복한가? 우리 자신과 매일같이 싸우면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런 삶은 좋은 삶인가?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오히려 자기 계발에 매달리고 매일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더 나아진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해 오늘을 갈아 넣을 때마다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 무엇을 해도 나 자신에게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더 할 수 있는데 더 노력하지 않는 것만 같고, 탈진해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다그치고 몰아넣어야 할 것 같은 감각에 시달렸다. 종국에는 30분의 낮잠도 용납할 수 없었고, 분명 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 나 자신과 관계가 틀어지고 있다, 내가 나를 포용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게으르게 살아도 행복했던 시절에는 오히려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하고 저주한 적이 없었는데,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수록 자기혐오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다행히 자신과의 단절과 악화된 스스로와의 관계를 자각하고 그만두었지만, 보통 이를 자각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보통은 이런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번아웃이 오거나 우울증을 경험한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오늘날 성과사회의 특징은 주인과 노예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이는 주인-노예의 관계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소멸은 완전한 노예의 폐지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와 주인이 하나로 결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성과사회의 주체인 현대인들은 스스로가 노예이자 감독관이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자기 계발을 하지만, 사실상 전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자유롭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해놓은 일 없이 하루 종일 뒹굴거려도 "오늘도 아무것도 못했는데 벌써 밤이야"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경험했듯 우리는 그렇지 않다. 밤늦게까지 뒹굴거리면 마음이 불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았다는 죄책감이 든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을 경험하기도 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무언가를 할 자유만 남은 사회에서, 이를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독관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가 우리 안에 심어놓은 노예 감독관을 인지하고, 그에게 반기를 들 필요가 있다.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자기 착취임을 자본주의는 알고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만을 필요한 양만큼만 생산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수준을 넘어서서 과잉 생산의 시대에 도래했다. 현대 사회에서 생산되고 있는 양은 인간의 필요가 아닌 자본의 필요를 위한 양이다.



단순히 자본의 증식과 기업의 확장,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정도, 그 이상으로 생산해내고 있는 상황에서 타자에 의한 생산력 착취는 반발심과 저항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늘어난 생산과 노동을 노동자들이 수용하고 합리화할 수 있게끔 자기 관리 담론과 자기 계발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노동자가 스스로를 착취하여 과잉 생산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대에 기여하게 되었다.



자기 계발은 절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소외시키는 작업이다. 나 자신과의 전쟁으로 스스로와의 관계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작업이다.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 시스템에 기여하기 위해 나를 갈아 넣는 작업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속삭임을 들으며 끊임없이 높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지만, 정말로 무엇이든 되었고, 무엇이든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고 있는가?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갈아 넣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내일은 오지 않는다. 내일은 항상 오늘이 된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졌다고 해도, 목표로 하는 미래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항상 미달된 상태로 남는다.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아무리 성장해도 만족할 수 없다. 목표는 달성될 수 없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자기 계발은 좋은 것이고, 나를 위해 하는 "투자"라는 맹목적인 믿음과 신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 속에 살고 있음을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불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목소리에 기만당하기를 멈춰야 한다. 그것은 만렙이 없는 게임에서 만렙을 달성하기 위해 무한의 계단을 오르며 스스로를 소모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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