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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20. 2022

관계의 역전: 자본을 위한 인간

한병철 [심리 정치]를 읽고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자본의 증식과 경제적 생산만을 위해 인간의 모든 것을 개조한다. 개인들은 개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세뇌당한다.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생애의 모든 과정에서 경제 성장과 생산을 위한 도구로 길러진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모든 교육은 오로지 취업만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직장에서 경쟁을 하고, 승진을 한다. 일생이 오로지 돈을 위해 돌아간다. 무엇을 배우든 목적은 배움 그 자체가 아닌 돈에 있게 되었다. 의사소통 능력은 직장에서 발표 잘하는 법, 직장의 리더로서 타인을 대하는 법, 고객과 대화하는 법, 거래처를 설득하는 법을 터득함을 말한다.



 사회생활은 진짜 공동체와 진실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닌 직장 생활을 의미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돈을 더 잘 버는 기계가 되기 위해, 인간의 모든 것이 그에 맞추어 길러진다. 인간의 대인 관계는 공감하고 아파하며 사랑하고 이해하는 법 대신 직장에서의 소통에 최적화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인의 잠재력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대신 경제 발전과 성장에 맞는 이상적 인재상의 모델을 만들어두고, 개개인들에게 그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든다. 자신의 고유함을 삭제하고 스스로를 통제하며 신자유주의가 만든 이상적 모델에 가까워질 때, 자본의 번식을 위한 도구로 더 철저히 전락할 때 개인은 "자기 관리 잘하시네요"라고 박수를 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인격은 없다. 인간은 말살당한다.





문제는 그것이 타인의 강제와 강요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경제 성장과 자본 증식의 도구가 되기 위해 개인은 열린 선택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공장 안에서 어떤 부품을 자신에게 골라 끼울지 선택하는 과정은 개인에게 자유롭다는 느낌을 준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는 어떤 기계가 될 것인지 선택할 자유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공장 안에서 어떤 노예로 살 것인지 선택할 자유이다. 중국어를 잘하는 노예, 틈새시장을 공략해 노르웨이어를 잘하는 노예, 코를 버선코로 갈아 끼운 노예, 더 두꺼운 입술로 갈아 끼운 노예, 배를 복근으로 갈아 끼운 노예...



인간은 조각조각 해체되어 곳곳에 어떤 부품을 착용할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계가 된다. 어느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되고 싶은지 고를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자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뛰쳐나가 내 두발로 잔디밭을 밟고, 내 두 눈으로 광활한 하늘을 볼 자유가 진짜 자유다.


공장 안에서 더 향상된 기능의 부품을 착용할 자유는 자유롭다는 느낌만 줄 뿐, 더 완벽한 노예로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한병철이 [심리 정치]에서 말했듯, 자유로운 개인은 그저 자본의 성기가 된다. 자본이라는 독재자가 짜 놓은 판 아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각조각 해체하고 다시 짜 맞춘다. 모든 것은 자본의 번식을 위해 행해진다. 이 일련의 행위들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포장 아래 자행된다. 이런 자유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착취할 자유다.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고유한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다 버린 뒤 시장에서 선택한 것들로 스스로를 싸맨다. 그런 행위들은 개성의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삶을 살(live) 자유가 아니라, 시장이 기획한 삶을 살(buy) 자유를 누린다. 전자는 인간의 자유이고 후자는 소비자의 자유다. 전자는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구성할 자유이고, 후자는 슈퍼마켓에서 선택할 자유이다.


하지만 시장이 차려놓은 레디메이드 자유를 우리는 원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 세계와 연결될 자유, 5G의 속도로 영화를 다운로드할 자유, 초고속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착할 자유, 언제든지 손 안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자유를 처음부터 원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을 때, 불편한 줄도 모르고 만족하며 잘만 살았다. 우리는 원한 적 없는 자유를 시장에서 돈 주고 구입하며 문명과 기술의 혜택, 자유를 누리는 중이라고 착각한다.







자유의 예속성이라는 역설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1. 우리는 이러한 자유에 대해 주체적인 관계에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선택하고 창조한 가능성이 아니라 자본이 착취를 위해 선별하고 생산한 자유, 자본이 미리 구성해서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옵션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착취 가능한 욕망, 상품화될 수 있는 욕망에만 자유가 주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가 관련되어 있는 실존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2. 자본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므로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본에 의존하게 된다.
3.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는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주고 자유를 사야 한다. 자본은 자유를 위해 돈을 지불하도록 유혹하고, 우리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다시 자본에 봉사한다. 더 많은 성과는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돈은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한다. 우리는 자본이 약속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최대한 착취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기술과 자본의 합작품으로 차려진 문명의 이기와 자유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스마트폰을 가지게 됨으로써 언제든 친구와 통화할 자유를 얻었으나, 기계의 배터리에 목을 매는 노예가 되었다. 전 세계인과 연결됨으로써 전 세계인의 포장된 희극과 내 심연 속 비극을 비교하며 불행해지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고, SNS 매체에서 유포되는 유해한 정보들의 검열, 몇 시간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게 된 대신, 보름에 걸쳐 이동할 여유시간의 상실 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문명과 진보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인간을 기술에 예속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불평등은 가속화, 심화되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자연의 재생-대신 신기술로 땜질하려는 방식의 해결책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자연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기술이 생겨나면 기술을 검열하기 위한 규제가 또 생겨난다. 인간이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면 할수록 과거의 문제는 곪고 새로운 문제가 쌓인다.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싶어 돌파구를 찾아다녔으나 도리어 자유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사기 위해 자유를 헌납한다. 자본이 채운 노동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노예로 전락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은 "노예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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