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ug 11. 2023

몸이 없는 삶은 가능할까?

디지털 증강의 시대에서 육체성을 말하다

트랜스휴머니즘과 디지털 증강이 대두되고 있는 추세이다. 현대 사회와 첨단기술은 몸의 변화와 육체성 유기성 유한성을 너무나도 혐오해서, 자꾸만 이를 초월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갖은 노력을 펼치고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디지털 증강으로 정신적 영생을 누린다거나, 유전자 가위를 통해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만든다거나, 기술로 몸을 증강하여 반쯤 기계가 되기를 원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우생학적인 사상에 기반해 있으며,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을 무시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몸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문화는 다 신체를 전제로 한다. 의복 문화, 음식 문화, 주거 문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 몸이다. 삶은 우리의 몸을 토대로 하며, 몸은 곧 삶의 무대라고 말할 수 있다. 신체는 인간에게 삶을 부여하는 장소다. 몸이 없는 삶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살아있는 삶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것의 흉내일 뿐이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신체의 보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 내려는 시도는 고대 서양의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시작되어 근대 데카르트 철학에서 그 절정을 맞았다. 서양에서는 이성을 신체에서 분리해내어 이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육체는 열등한 것, 부정적인 것,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서양의 분리-육체와 정신이라는 이분법-은 수직적 위계질서의 피라미드 형태를 띄고 있다. 오늘날 지구의 상당수가 개발되고, 서구화되면서 이러한 서구적 사상을 받아들여 신체와 정신을 개별적인 것으로 다루게 되었다. 서양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몸이란 단지 이성을 담고 있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서구 문명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분리의 철학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불가분한 존재이다. 사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로, 상호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유지한다. 분리의 피라미드 대신 구심점으로 향하는 순환을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유기체의 매커니즘이다.


실제로 고대 동양철학이나 원주민들, 서구 문명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적게 받은 전통적 사회에서는 몸과 정신이 분리될 수 없으며, 신체 곳곳은 만물의 영혼이 깃드는 통로라고 해석된다. 순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다른 생명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도 모두 생명의 몸이다. 우리의 삶은 다른 생명의 몸을 통해서 부지할 수 있고 우리의 몸 역시 다른 생명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 지구, 자연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자연과 분리된 현대 도시에서는 느낄 기회가 없으니 몸 없는 삶이라는 모순을 꿈꾸는 것이다. 








기계와 기술 문명의 가속화와 더불어 몸 없는 삶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소외가 원인이다 하나는 몸의 소외이고, 하나는 삶의 소외이다. 


첫번째로 몸의 소외이다. 오늘날 인간은 이성만을 중시하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 몸으로 하는 노동 등 몸을 소외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잘 계산하는 것만이 인간의 덕목이 되었다. 하지만 본디 인간 삶의 본질은 머리로 계산하는 것, 머리로만 하는 노동이 아니다. 인간의 문화는 양식을 얻기 위한 신체와 정신의 합일적 노동에서 싹텄다. 문화 culture와 경작 cultivate의 어원이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이 이 지구에 존재했던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인간의 삶은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온 몸으로 지금을 살아내는 것이 곧 삶이었던 것이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얻고, 즐겁게 웃고 춤을 추고, 낮잠을 자는 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삶을 지탱하는 모든 일들은 몸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느껴지는 몸의 감각과 직관과 마음의 흐름을 따라 살아왔다. 인류에게 삶은 온 몸의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살아있다는 자각, 삶의 실감은 언제나 몸으로부터 온다. 



현대에서 몸은 그저 노동과 자본 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몸은 산술적으로 환원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신체는 계급 표현의 일환 또는 값비싼 노동력으로써 기능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현대인은 자신의 몸을 유기체나 자연으로 인식하지 않고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계로써 인식하게 되었다. 외모에 대한 집착, 강박, 젊음에 대한 집착, 건강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증거이다. 몸은 자본 생산에 최적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산업화 이후 현대에서는 삶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이 되어버렸다. 몸 없는 삶이라는 발상의 근원은 주객전도이다. 원래 삶이란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잘 느끼며, 지금 이 순간에 잘 존재하는 것. 그 순간을 온 몸으로 느끼며 머무르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진정한 삶의 목적이자 본질이다. 그러니 몸이 아니면 삶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현대인은 정작 자기 삶에 들이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강제된 노동을 하느라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잘 시간이 없어 늘 피곤에 시달리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어 여가를 갈망한다. 사실은 잠과 휴식과 식사가 오늘의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들임에도 정작 식사와 잠과 휴식에 들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는 법마저 잊고 말았다. 정성 들여 요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불면증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잘 쉬는 것인지 조차 모르는 게 현대인의 실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계의 동물들은 늘 충실하고 온전한 삶을 산다. 살아있는 매 순간 그들이 느끼는 감각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살아간다. 짧지만 모든 순간마다 밀도 있게 존재하며 자신만의 삶을 이어나간다.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생각은 과거에 가있거나 미래를 걱정하지만 행동은 지금 이 순간, 현재에 뿌리내리게 한다. 머리만 쓰는 정신 노동은 불안을 낳고, 행동은 불안을 해소한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와 몸의 분리에 대해 깨닫고, 많은 구루들을 찾아 명상을 시작하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삶이 머리의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것의 영혼은 단지 이성에 있지 않으며, 영혼은 마음에 기인하고 마음은 신체에서 온다. 몸은 우리의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도록 세계에 뿌리를 내려준다. 삶의 순간을 온전히 실감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몸이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동물이 하등하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