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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10. 2023

동물이 하등하다고?

채식을 한 뒤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약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의식의 변화 단계를 거쳤다.


자기 초월을 위해 조금은 수행적인 마음도 가져 봤다가, 진실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애타게 얻으려고도 해 봤다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품어도 봤다가, 진짜 내가 원하는 세계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려도 보았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누구도 무엇이 되기 위해 자기의 삶에서 애쓸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은 삶. 궁극적으로 자연-신-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흐름대로 살아도 그 누구에게 해가 되지 않는 평화의 세계. 만물이 느긋하게 조화를 이루며 생동하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아무것도 모름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분해하고 파악할 수 없으며 자연을 넘어서고자 해도 헛된 수고이자 자기 파멸적인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속해있음을 인정하고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알고자 하는 것은 통제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그 비뚤어진 욕망을 내려놓고 겸손해짐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초월하여 신이 될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삶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동물적 욕구를 넘어설 필요도 없다. 다만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가 남을 해치면 그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 그거 하나만은 자명하다.


우주는 항상 조화로운 평형 상태를 이룬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지만, 이것은 성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점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연결된 상태에서 타자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나에 대한 폭력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은 인간의 훌륭한 영적, 실천적 스승이다. 인간은 아주 오만방자하게 스스로를 고등동물이라 칭하며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다른 생명체들보다 영리하고 우월하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급기야 자기 종족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자의식 과잉에 찌든 학명까지 붙이기에 이렀다. 내 생각에 이 행보는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제일가는 흑역사로 치부해야 하지 싶다. 실제로는 지구에서 가장 철없는 막내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동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지구 위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 말인즉슨,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종족을 파멸에 이르게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종족을 몰살하지도 않는 균형상태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연을 입맛대로 바꾸려다 훼손하는 멍청한 시도를 하지도, 식민지배로 다른 존재를 고통에 몰아넣지도, 자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려는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맹목적이지만 의미 없는 성장을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다 먹자고 남을 굶기지도 않았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종족을 불행에 처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동물들은 허둥지둥 바쁘게 쫓기며 살지도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머무르며 살아간다. 생명체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계급과 잉여 생산이 발생한 이후로 나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애쓰는 삶을 살았다. 타자를 짓밟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눈이 돌아있다. 그 결과는 식민지배, 계급 질서, 전쟁, 기아와 빈곤, 부와 음식의 불평등한 분배, 인간성 붕괴로 나타났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는 맹목적인 성장 신봉은 급기야 멸종 위기 생물종의 터전을 밀고 골프장이나 짓겠다는 무지한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인간이 만든 허구가 실재보다 우선이 되고야 말았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원된다. 돈에 대한 기이한 탐욕은 가오나시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무지한 소비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돼지처럼 탐욕의 결과를 먹어 치운다.








남의 희생을 발판 삼아야지만 잘 살 수 있는 기이한 소비 시스템. 실제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범국가적 범죄가 만연한 사회. 그것이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선진국과 도시의 삶은 남반구, 개발도상국, 농촌에 기생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육식, 공장식 축산은 동물종 홀로코스트-집단 학살-행위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품고 있는 경이로움은 삭제되고 오로지 생산성을 위한 도구로써 착취당하고 있다. 생명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기계지 생명이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회주의 투쟁의 실패로 자본주의가 마치 인간 문명 진화의 종착점인 것처럼 추앙되고 있다. 한국은 이념으로 인한 분단국가 상태에 있기에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다.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폐해를 모르지도 않으면서 어쩔 수 없다,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내가 더 잘 살기 위해 더 노력하는 수밖에 답이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특정 계층-점점 다수가 되어가고 있음-을 빈곤과 불행으로 몰아넣는 시스템이 어째서 유지되어야 하는가? 부당하다면 변혁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 왔으나 자본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체계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교묘하게 감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시스템의 기만질에 순진하게 놀아날 수는 없다. 이제는 지구가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이를 방관하기엔 생태적 한계에 봉착해 있다.







요즘도 가끔 친척들에게 왜 채식하냐는 질문을 듣는다. 그것이 핀잔이 아니라 단순한 궁금증이라는 것을 알지만, 답하기엔 조금 곤란하다. 우선 장황하게 설명하자니 입이 아프고 밥상 앞에서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연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설명해 굳이 상대방 입맛을 떨어뜨리고 싶진 않아서 "그냥 맛없어서요. 건강에 좋아서요." 정도로 얼버무리고 넘어가곤 한다. 진짜 대답은 속으로만 삼킨다.


"속죄하고 싶어서요."


내 몸에도. 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피해를 본 수많은 생명들에도. 불필요하게 동물의 살점을 취하느라 남의 밥그릇을 빼앗았던 일에도. 가공식품을 먹으며 덩치 큰 식품기업의 기만질에 동참해 왔던 것에도.


오만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범죄를 눈감아 왔는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하고 살았는가. 그것을 모른 채 얼마나 오랜 시간 살아왔는가. 육식이 미식이고, 많이 먹고 화려하게 먹는 게 잘 먹는 것이라고 정당화해 온 지난날들에 속죄하고 싶다. 속죄하고 다음 생엔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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