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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14. 2023

상품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반(反)예술성

우선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본질과 목적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있다. 외관이 아름다운가 아닌가, 단순한 미추의 판단을 떠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널린 기계가 대량 생산한 상품은 겉으로 봤을 때 예술가의 작품보다 아름답다고 느껴지거나 혹은 양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그 본질 자체가 인간의 삶을 빈곤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어서 예술이 될 수 없다. 예술과 소비재의 차이는 거기에서 발생한다.


 기계의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소비재는 우리의 삶을 빈곤하게 만든다. 광고와 마케팅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끊임없이 소비재가 생산되어 나오는 이상, 인간은 현 상태에 만족할 수 없다. 소비재를 팔기 위한 광고와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롭게 출시되는 다양한 소비재들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지금 가진 것에서 만족할 수 없는 빈곤한 존재가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구입해야만 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 바로 소비재, 즉 상품의 본질이다. 현대 사회는 소비자로 전락해버린 사람들에게 불만족스러움을 주입하기 위해 계속해서 유행을 만들고 신제품을 개발한다. 현대인은 상품의 향연으로 인해 스스로 타인과 비교하며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원하는 정신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러한 삶의 종착점은 결국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뒤처진 물건들 틈에 둘러싸여 존재의 빈곤으로 허덕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대인은 상품이 야기하는 이러한 정신적 빈곤으로 인해 쇼핑, 알코올, 마약 등에 중독되기도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된 상품이라 할지언정 이러한 정신의 근본적 빈곤을 해결해줄 수 없다. 대량 생산된 상품의 소비는 예술의 향유와 달리 감정의 표면적 화풀이에 불과하다. 현대인은 지친 심신과 낮아진 자존감, 부족한 시간과 정신적 여유에 대해 잃어버린 삶의 자유를 보상받고자 상품을 마구 소비하지만 그저 잠깐의 분풀이로 그치고 만다. 상품 그 자체가 애초에 지속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품은 불만족을 만들고 금방 교체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상품은 갈수록 고도로 개인화되고, 커스터마이징화 된다. 소품종 대량생산을 떠나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가 왔다. 드폰도 내가 원하는 색으로 깔맞춤 할 수 있고, 냉장고 색도 내가 원하는 색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도로 개인화 된 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개성을 상품에 귀속시킨다.


오늘날 아이디어스와 같은 플랫폼에서 작가로 등록된 사람들이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것은 엄연히 상품이다. 오히려 철저히 자본주의화 된 상품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개인이 가진 고유성이나 개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교묘하게 건드린 마케팅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작품, 작가, 창작과 같은 그럴싸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결국엔 사업일 뿐이다. 그렇게 개별화되고 다품종 소량생산 비스포크 커스터마이징 할수록 차별화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심리를 이용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다.


다 똑같은 옷, 다 똑같은 물건에 인간은 이미 질렸다. 사실 인간은 모두 차별화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비스포크, Z플립, 커스터마이징, 소소하게 만들어서 판매하는 하나뿐인 창작물. 이런 것들은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건드려서 오히려 소비를 부추기는 고도의 마케팅 술법이다. 인간의 타고난 개성이랑 고유성을 오로지 상품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상품이 곧 개인의 정체성으로 탈바꿈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예술성을 발휘하는 대신 온 몸에 상품을 두르고 자기 자신이라 믿게 된다.








 또한 기계화, 자동화로 이루어낸 상품의 대량 생산은 인간 삶의 터전인 지구를 파괴한다. 대량생산되는 물건들은 제 3세계에 그 빚을 떠안기고, 수요가 있기 전에 필요 이상으로 생산해냄으로써 지구 자원을 계속해서 소모하고, 파괴한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존재하기 위해선 지구, 자연이라는 기반을 필수로 요구한다. 그런데 대량생산되는 상품은 지구를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존재의 기반이 되는 삶의 공간을 파괴한다. 패스트패션으로 인해 매년 버려지는 의류 폐기물은 남반구의 강을 막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는 남반구의 숲을 파괴한다. 아무리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대량생산되는 상품은 파괴를 수반한다. 지구라는 생명 공동체들의 삶의 공간을 파괴하는 상품을 두고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삶의 기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는 기술은 영어로 technology가 아니라 art이다. 예컨대 가구를 만들거나 옷을 짓거나 수공예로 직접 액세서리를 만들거나 하는 활동들이 삶의 기술이 된다. 그러나 상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재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삶의 기술 역시도 빼앗아간다.


 제 아무리 예쁘게 만든 상품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고장이 나면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일 뿐이다. 필요해지면 매장 진열대에 가서 상품을 구입하고 계산하면 그만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삶을 시장에 외주 맡기고, 점점 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며 무능해지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더 복잡한 물건,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정작 삶에 필요한 기술은 거의 잃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아무리 고급진 외제차라 할지언정, 차는 걷기의 기술, 풍경을 감상하는 기술, 세상을 관찰하는 기술을 빼앗아 간다. 또한 아무리 좋은 최신형 스마트폰이라 할지언정, 기억의 기술,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의 기술, 교감의 기술을 빼앗아 간다.


 대량생산된 상품이 예술 작품이라 불리는 것보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있으나 그 본질 자체가 삶, 시간, 정신, 자연,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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