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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22. 2023

우리는 왜 만족을 모를까?

황폐해진 삶에서 아름다움 되찾기 

정체된 삶도, 불안정한 삶도 싫어! 


현대인들은 확실히 정체되어 있는 삶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늘 새로운 자극을 찾기 위해 맛집 탐방, 여행, 쇼핑, 해외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 달 살기를 시도하는 등 무료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토록 정체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우리는 계속해서 무료한 일상을 떠냐 새로움과 일탈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인간이 원래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수렵채집인의 본능으로 인해 원래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매일 무언가를 찾기 위해 채집과 사냥에 나섰고, 분명 그 과정에서 늘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통제 영역 밖에 있는 자연은 매일 인간에게 다른 하루를 선물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정체되어 있는 삶이란 본능에 맞지 않는 삶이고, 안정되지 못한 삶이란 생존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삶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농경시대를 거치며 흉년으로 인해 먹거리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등 불안정한 식량 수급으로 궁핍해지는 상황을 겪어왔고, 안정적인 삶을 갈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수렵 채집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려는 욕구가 강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처럼 막연한 여행에 대한 갈망, 삶의 터전으로부터의 이탈 등에 대한 욕망이 그들에겐 없었다는 것이다. 느린 삶의 호흡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도 수렵 채집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원주민들을 보면 자신이 발 붙이고 있는 땅,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일종의 불만을 품는 현상은 없다. 모두가 삶을 시작한 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또한 그들은 변화무쌍한 자연에 늘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자연에 적응해 왔다. 부족에서 숙련된 식물 채집가는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는지, 어디에 가야 무엇이 있는지 등을 꿰뚫고 있다. 그들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안정적이다. 그들은 통제 불가능한 자연 속에서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며, 일생 동안 변하지 않는 삶의 공간과 마주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싫증이나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도 그렇다. 현대 문명과 떨어져 지내는 자연 속 작은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 이를테면 라다크나 베트남의 캇캇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무료하다 생각하거나 정체되어 있다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은 유독 일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못해 안달인 것이며,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경계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현대적 삶의 병리적 특성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은 죽어있다. 현대인은 살아있는 흉내를 내며 살아 간다. 삶을 실감하지 못하고 죽은 공간과 죽은 물질들 틈에 둘러싸여 죽은 시간을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관광, 쇼핑, 여행 등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고 정체된 일상에서 탈피하고자 애를 쓰지만 결국 그것은 한시적인 체험에 불과하다. 결국 돌아오면 죽은 집과 죽은 상품과 죽은 시간만이 반겨줄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주거 공간은 죽어있다. 현대인은 삶의 영역을 모두 효율성과 수익성으로 계산한다. 삶이란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계산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때문에 집은 개인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을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외부와 단절되도록 가두어 놓은 우리로 전락했다. 단적인 예로 아파트를 보자. 아파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개성과 체질, 삶의 방식을 가졌음에도 모두가 공장에서 복제한 것처럼 똑같이 생긴 공간 안에 거주한다. 직접 살 사람이 아니라 대형 시공사와 건설사가 설계하여 지은 집은 거주자의 삶을 거주 공간에 반영하지 못한다. 자본과 시장이 대신 지어준 집에 기어 들어와 그저 지친 몸을 누이고 주린 배만 겨우 채우며 사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니다. 삶이 그 목적 자체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 아니다. 이는 공장식 축사의 돼지가 자본 생산을 위해 상자 같은 우리 안에 갇혀 숨을 쉬다 죽는 것과도 같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현대인은 거주성을 잃어버렸다. 거주란 단순히 어느 지역에 살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주는 그 땅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거주란 기본적으로 소속감을 필요로 한다. 소속감은 연결되어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다. 남이 지어준 상품 가치로서의 집, 소비의 장으로서의 집, 더 비싼 곳으로 건너가기 위한 집, 어느 도시를 가도 똑같은 풍경과 똑같은 설계도로 만들어진 집, 이웃과 단절되고 관계가 끊어지고 교류를 가로막는 현대의 집은 결코 연결을 대표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현대인은 집에서 거주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상자 안에서 숨을 쉬다 죽는다.




또한 현대의 시간은 죽어있다. 현대에서의 시간은 지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무조건 아껴야만 하는 것, 낭비해선 안 되는 것, 늘 부족한 것, 결핍의 대상이 되었다. 시계가 시간을 부족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어느 유명한 말처럼 시간을 1분 1초 단위로 분해할수록 시간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인간은 점점 유기체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로서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간 역시도 효율성과 계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시간을 아껴주는 기계들이 계속 발명되지만 시간은 항상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니치 표준시는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생동성을 앗아가고 세상과 인간을 동질화시켰다. 예컨대 오늘날 사람들은 해가 늦게 뜨는 겨울이나 해가 일찍 뜨는 여름이나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점심 식사를 한다. 그러나 자연의 리듬은 이러한 기계적인 리듬과는 다르다. 현대인의 시간은 시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생산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은 인간이기보다 기계이거나 도구이기를 요구당한다. 애초에 현대란 근대 서양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하겠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은 타율적 노동의 시간과 노동을 위한 시간으로 나뉜다. 우리는 자기로서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또한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바로 불안이다. 본래 인간의 안전장치는 공동체와 자연이었다. 늘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고, 삶의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자연이었으며, 작은 부족 생활을 통해 구해온 음식을 나누고 다친 이를 치료해 주면서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자 안전망으로 존재해 왔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이 호혜적 관계 아래 선물처럼 주고받으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삶에 필요한 안전망을 모두 해체하고 소비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졌다. 현대의 거주 공간은 인간과 인간을 단절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단절시켰다. 단절시킴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 계급과 계층의 역할을 담당한다. 돌봄은 서비스가 되고 의식주는 상품이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은 병원의 고객님으로 태어나 기업의 고객님으로 살다가 요양원의 고객님으로 죽는다. 또한 동시에 그 체제의 생산자로 살아간다. 현대인의 삶은 피착취자이자 착취자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 수 없으며, 지켜주지 않는다는 불안과 불신이 있어야 상품을 소비하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여 생산력을 높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도생 하지 않으면 각자도사 한다. 안정되지 못한 삶과 불확실성을 기피하는 경향,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은 현대 사회가 만든 신경질적인 불안에서 기인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안정적인 삶의 양식 -안정적인 직장과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규칙적인 생활 패턴 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 걱정 없는 안정적인 마음을 원하는 것이다. 








유명한 저서인 무탄트 메시지 속 참사람 부족이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도 가장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 자연, 동료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신뢰가 삶의 안정감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삶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사회화된 기호에 맞추어 개조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자기 다운 인생을 누려도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아름다운 삶이란 모두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 따라서 호혜와 신뢰, 나눔과 공생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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