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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31. 2023

기후위기, 대안은 없는 걸까?

인류가 초래한 공멸의 시대, 극복을 위해선 근본부터 살펴봐야

이제는 기후 위기가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매일 새로운 이상 기후 징조로 뉴스가 나오고, 양식어가 폐사한다거나 꿀벌이 떼죽음을 당하고, 멸종 위기종이 늘어가는 등 이미 생태계에서 여러 위험한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자연을 위한 정책보다 이윤을 위한 정책만을 발의하고, 입법시키고, 추진한다. 과연 인간에게 돈이 우선일까?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 할 일인 걸까? 이윤 추구가 당장이야 돈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인간을 배신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 이윤의 추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이윤인가? 이 이상의 경제 성장이 소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갈수록 불평등은 심해지고 물가는 오르고,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약자일수록 물가 변동에 취약하고, 물가는 결국 기후에서도 떼어낼 수 없는 문제이다. 식량 생산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식량 값이 오를 것이고, 화석 연료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에너지 사용료가 오를 테니 말이다.


기후 위기는 약자부터 무너뜨린다. 경제 성장을 위한 성장, 돈을 위한 돈 투자는 기후 위기 가속의 페달이다. 기후 위기란 어떻게 보면 사실 인간 위기의 결과이다. 인간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가능하지 못할 때, 인간 문명은 자연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더 많이 생산하고자 하는 자본계급의 탐욕에 의한 자연 파괴, 성별이나 인종, 계급 간 불평등처럼 인간 사이의 관계 왜곡 등은 결국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정동한다.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동하여 조화를 맞추는 유기체다. 생명들 간의 조화가 깨지면, 지구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게 해서 지구가 여러 차례 대멸종을 맞이하고 생태대가 변화해 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질과 기후, 생태계의 변화가 자연적인 흐름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이번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앞당겨진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우리가 맞이한 기후 위기는 사실상 인간과 현생대 생태계의 위기다.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위기다.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다. 모두의 집인 지구에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면 쫓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하지 않은가? 지구는 인간만 사는 곳이 아니고, 자본가만 사는 곳도 아니다. 돈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유 공간이다. 함께 사는 집을 파괴하는 자가 있다면 추방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태 인류가 거쳐온 모든 문명은 몰락했다. 도시가 커지고, 욕망이 자라는 데에 반해 도시를 지탱할 기반은 협소해지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자 노력한 이래, 그 방향이 항상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기본 전제는 인간 이성 중심 주의로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극복한다는 것인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어떻게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자 불가능한 시도이다. 이 거대한 자기부정적 세계관은 결국 타인을 부정하고, 타자를 부정하고, 다른 존재를 짓밟는 방식으로 이룩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여성, 아이, 가축, 자연을 무한히 제공되는 노예로 삼아 번성하고 몰락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전 지구를 식민지로 삼고 있는 세계화된 문명이다. 무너진다면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한국에서 소비되는 물건을 위해 베트남에서, 인도에서, 아프리카에서 노동자가 희생당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착취는 더욱 악질이다. 뜻하지 않게 착취에 가담하고도 본인이 잘못된 행동으로 가해자가 되었는지 모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맹목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도그마 앞에 합리화된다. 자본주의로 인류가 양적 성장을 이루는 동안, 지구의 상태는 수십 배로 악화되었다.


가부장제, 식민지배, 자연착취, 동물학대, 여기저기서 만연하게 벌어지는 범죄와 폭력, 기아와 불평등, 해결되지 않는 빈곤... 자본주의의 원인이자 결과가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비인도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가에게 삶을 바치고 노동한다. 생태계에 미친 영향도 영향이지만, 인간 사회만 보더라도 과연 이게 올바르고 좋은 삶일까?


IPCC 보고서에서는 이제 경제 성장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한한 경제성장이 아니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한한 성장은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건강한 생명체와 생태계는, 일정 수준까지 성장하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성장을 멈추고 원숙해진다. 그러다 이후 천천히 노쇠하여 생을 마감하고, 다시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밑거름-이 될 준비를 한다. 직선적으로 혼자 독차지하며 성장하는 우상향 그래프가 아니라 원을 그리는 순환의 모습이 바로 자연스러운 상태인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로 살아가는 삶은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 무한대로 팽창해 나갈 줄 밖에 모르는 도시에서의 직선 그래프와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택해야 할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일회용품을 줄이고 아껴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될까?









지금의 도시 문명이 처한 문제는 우리가 의식주를 시장에 외주 주고 그것들을 상품화시켜 외부에서 생산해 내느라 식민화할 외부의 땅과 노동력, 쓰레기를 폐기할 땅, 벌어야 할 돈이 필요해져서 생긴 문제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의식주를 공동체 단위 내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유전자 변형된 종자와 농약, 화학비료, 보존제 등으로부터 안전한 먹거리를 얻고, 외부의 수출 사정에 기대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자급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의 식량을 직접 길러내는 것이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 많은 공동체 혹은 자급 농가들이 이러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퍼머컬처 (permaculture) 이다. 퍼머컬쳐는 '영원한, 영구적인'이란 뜻의 퍼머넌트(permanent)와 농업을 뜻하는 어그리컬처(agriculture)의 합성어로, 기존의 땅을 황폐화시키고, 탄소 배출의 주범이 되어왔던 관행 농법과 달리 영속 가능한 농법을 중심으로 재편된 인류의 새로운 문화를 의미한다.



퍼머컬쳐는 밭이 자연의 숲을 닮도록 하여 밭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태계가 형성되고, 순환 고리가 작동하도록 밭을 디자인한다. 일반 정원처럼 미관도 중시하지만 의식주의 자급과 자립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식용, 약용 작물과 다년생 작물, 과수, 목화 등 인간의 삶에 유용한 식물들을 중심으로 밭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무투입, 무경운, 무제초 등 인위적으로 밭에 개입하는 행위를 최소화하여 자연의 생태계가 저절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농사와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자연 농법이라고 부르며 각종 자연농에 관한 교육과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을 후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제 와서 웬 농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류의 식생은 1만 2천 년 전부터 농업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국가는 농경이 주를 이루는 삶을 살아왔다. 농업은 이미 1만 2천 년의 실험을 통해 입증된, 인류가 먹거리를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방법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는 섭식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안정적인 식량의 공급은 공동체 단위 혹은 개인의 자급 농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화 culture와 경작하다 cultivate의 어원이 동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문화는 농사에서 꽃을 피워왔다. 특히나 일손이 많이 필요한 논농사를 중심으로 해 온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연 그리고 공동체와 어우러져 함께하는 두레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을 보호해 주는 최소한의 울타리는 바로 이렇게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는 자연과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공동체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개인이 뿔뿔이 원자화되어 소비자로 전락한 지금은 오로지 상품에 대한 탐욕, 살기 위해선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끝없는 소유욕, 경쟁심이 인간을 지배하고 지구를 파괴한다.


지구가 우리 모두의 공동 살림이라는 말은 더 많이 가져가는 누군가로 인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누군가가 생김을 의미한다.


무소유는 공동소유의 다른 이름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터인 지구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생명체는 인간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이며, 경쟁을 좋아한다는 지금의 경제학이 과연 옳은 전제일까? 더 가지기 위해 경쟁하고 전쟁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으나 오히려 불행은 만연해졌다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공동 소유 정신에 입각한 공동체 실험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야마기시 공동체와 선물경제로 이루어진 셰어하우스, 웰 요코다이가 그 예시이다. 이들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서로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공동체의 살림살이에 기여함으로써 서로 선물하며 살아간다. 공짜로 해주고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는 데에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자연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돈이나 화폐가 오고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경제가 성장해야 잘 사는 것이라는 미신,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을 버리고 자연을 닮아가며 서로 살리는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생명체다. 기계를 뜯어먹고 연명하거나 가상화폐를 쌓아 삶터를 지을 수는 없다.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근원이 애초에 기술과 자본이다.


경제에 의해 생명의 존엄성이 가장 경시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대 사회가 가진 모순일 것이다. 우리는 현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깨고, 새로운 삶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7세대 뒤를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생각하며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사회가 자연을 닮은 농업과, 그를 중심으로 사람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재능이 오고 가는 반농반X의 사회가 될 때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열릴 것이다. 거창한 것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도시 텃밭이나 주말 농장을 가꾸는 것부터 해보면 어떨까? 수입산 음식, 레토르트나 인스턴트 대신 지역 농산물로 집밥을 차리는 것은 어떨까? 고기를 쓰지 않고 요리를 해보면 어떨까?


나 역시도 이러한 성찰과 반성을 발판 삼아 나 자신, 농촌, 제3세계, 지구를 착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앞으로 자연 농법이나 생태건축, 전통 음식 제조, 손바느질, 한국 고유의 생태 어업인 나잠-물질- 등 다양한 자립 기술을 익혀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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