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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22. 2023

배는 부르지만, 그래도

가끔씩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나 생각들이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존엄성 없는 노동은 하기 싫고, 건강한 방식으로 생산된 자연식만 먹고 싶고, 무의미한 일은 하기 싫고, 기아나 기후위기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고 동떨어진 이야기들만 걱정하고 있는 것 등등.


당장 오늘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오늘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해야 하고, 존엄성이나 의미를 찾는 것보다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저 배부른 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것도 당장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먹을 것과 마실 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덕분이 아닐까 싶다. 오늘 먹고사는 게 급급하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당장 굶어 죽을까 걱정할 필요 없는 정신적, 경제적 여유가 있기에 그다음 차원을 걱정할 수 있음이 종종 기만자나 위선자의 여유 같아서 부끄럽게 느껴진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노동을 선택하고 싶다는 말도,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싶다는 말도 강제된 가난에 놓인 사람 입장에서는 같잖은 말로 여겨질지 모른다. 배부르고 등 따숩게 자라 가난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 저런 말을 지껄인다고, 부르주아의 헛소리라고 욕해도 사실 할 말이 없다.


오늘 내가 아파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기후위기니 뭐니 하는 말 같은 건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 오늘 벌어 오늘 써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니 뭐니 하는 말 같은 건 그저 허황된 망상처럼 들릴 수도 있다.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없이 사는 사람들 처지도 모른다고.


알바가 나를 지치게 한다는 이유로 그만둘 때, 상사가 나를 인격적으로 망신 준다는 이유로 그만둘 때,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내가 나의 존엄성을 우선시할 수 있고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는 것 또한 그만한 힘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당장 내가 학비를 벌어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만둘 수 있었을까. 학비를 내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만 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알바까지 몇 개씩 뛰는 애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아마 잘 먹고 잘 사는 이상주의자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재수 없어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어떻게 해야 맞는 건지 종종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생태 마을 탐방이라는 꿈도 욕심은 아닐까. 생태계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도, 해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사회적 경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은 것도, 어쩌면 전부 욕심은 아닐까? 불현듯 그런 물음이 떠오를 때면 어딘가 모를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고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나는 많은 것을 가졌다.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집이 있고, 나를 지원해 줄 부모님이 계시고, 알바를 하지 않아도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경제적 여유가 있고, 음식을 가려먹을 여유도 있으며 하물며 시간도 많다. 몸이 아파 큰 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며 취업을 당장 하지 않으면 가계가 무너지는 상황도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쫓을 여유가 된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나로 하여금 더 먼 곳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 앞에서 태평한 말이나 늘어놓고 있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면, 그렇지 못한 존재들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지 못해서 더 많은 것을 독차지하려는 것보다, 내가 누리는 것을 남들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당장 오늘 생계를 걱정하며 아무 일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매 끼니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라는 것에 안주하는 대신, 그들의 아픔을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 없도록 내가 가진 것을 십 분 활용하겠다는 마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적성과 가치관에 맞는 일을 찾고 싶듯, 모두가 생계 걱정 없이 각자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아무도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재난을 멈추는 것. 만일 내가 당장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관심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이러한 일에 목소리를 낼 상황에 있다. 만약 모두가 제 입에 풀칠하기 급급해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면 아무도  바꿀 수 없을지 모른다. 내가 그러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하여 내 힘을 더 쓴다면. 그들의 존엄성도 지키기 위하여 신이 나에게 이만한 여건과 소명을 주신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조금 배가 부른 투정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궤변을 늘어놓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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