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J Mar 25. 2018

[로마의 평일 8] 이탈리아 이웃사촌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

인간적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낀 계기는 크리스마스에 인접한 연말에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간적인 이웃사촌들 덕에 난감한 상황에서 구출된 사건을 하나 겪었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금요일. 하루만 더 출근하면 내내 일주일 쉰다는 생각에 가볍게 출 일하던 차에 아부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이틀 전부터 방학해서 내내 집에서 뒹굴고 있는 애들에게 한낮 햇빛을 조금 쬐어 주어야 할거 같은 마음에 옷 입혀 산책을 끌고 나가셨는데 두놈과 씨름하며 나오시다가 그만 문 안쪽 열쇠를 뽑지 않고 그냥 밖에서 쾅 닫아버리신 거다.


대부분의 유럽 집 대문이 그렇듯이 우리 집 대문도 밖에서는 문고리를 돌릴 수 있는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는 걸쇠를 잡아당길 수 있는 손잡이가 하나 있지만 문 밖에는 오직 열쇠구멍만 있다.


안이든 밖이든 열쇠가 잠금장치이자 손잡이 역할을 같이 하는 구조. 문을 닫아버리면 밖에서는 열쇠 없이 아예 문을 열수가 없으며 열쇠가 안 꽂혀 있으면 구멍이 막혀버려서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어도 바깥 열쇠구멍에 아예 들어가질 않는다. 이 경우는 열쇠를 안에 꽂아놓고 문이 닫힌 상황이니 내가 여분 열쇠를 회사에 갖고 있었지만 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나오신 마당이고 이미 점심 시간이니 회사 근처에서 만나 식사부터 하고 집에 어떻게 들어갈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일단 열쇠를 돌려서 잠근 것이 아니고 그냥 쾅 닫기만 한거라면 그래도 시도를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댄다. 설명하기 좀 난감해하더니 뭔가 엑스레이 같은걸 이용해서 걸쇠를  여는 방법이 있고, 그게 아니면 옷걸이 철사를 쑤셔서 열쇠를 밀어내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엑스레이라길래 나는 처음에 도둑 영화에서 나오는, 끝에 카메라 달려서 구멍에 쑤셔넣고 막 보이는 그런 거 말하는 거라고 알아들었다. 흠... 그거 사람 불러야 하고 비싸겠네.. 하고 생각하며.


하지만 약간의 구글링과 다시 한번 심도깊은 대화를 나눠본 결과 동료가 말한 건 말 그대로 엑스레이가 맞았다. 엄밀히 말하면 엑스레이 필름지.


 으로 신용카드 같은 걸 끼워 넣고 슬라이딩을 시켜 걸쇠를 푸는 원리를 이야기하는 거였다. 하지만 차마 재발급받는데 2개월 이상 걸리는 신용카드를 희생할 수는 없거니와 문 틈 사이가 카드 두께보다는 더 좁고 깊어서 잘 구부러지면서도 크기가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한 상황. 적당히 심지가 있으면서도 얇은 책받침과도 같은 것. 동료도 예전에 같은 상황에서 엑스레이 필름지를 썼는데 잘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엑스레이 필름지가 있을리가 없. 그런 걸 이런 때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최소 의사나 의료계 종사자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간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사무실에서 파일 껍데기, 코팅된 이름표 등등 뭔가 대체할 만한 물건들과 유사시 이용할 가위, 칼 등등의 공구를 들고 집으로 출발했다. 도착해서는 일단 고전적으로 열쇠도 넣어보고 문을 흔들어도 보며 무식한 방법부터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작은 빌라 같은 건물 1층에 있고 엘레베이터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전체 건물에 총 18가구가 살고 있으니 그닥 많은 수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셔서 낮에도 사람 출입이 잦은 편이다.


애 두 마리는 계단 오르내리며 소리치며 고 있고 아지랑 나는 끙끙대며 문을 따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하고 있자니 혹시 누군가 나를 도둑으로 보면 어쩌나, 이거 혹시 신고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집안에 열쇠를 꽂아놓고 문이 닫혀버렸어ㅡ 라는 문장을 검색하여 입에 되뇌이며 열심히 문과 씨름을 했다. 한 10여분 이상 쑤셔도 안되길래 이제 그만 열쇠공을 불러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접어들던 차.


나를 도둑으로 보는 이웃이 있을거라는 것은 내 기우였다. 내가 인사한 이웃은 고작 3-4명이지만 우리 건물 사람들은 1층에 애 둘 데리고 이사온 동양여자에 대해서 아마도 콜로세움 한 열댓바퀴 돌만큼 정보를 공유한 듯 했다.


많은 사이트에서 돌아다니는 이런 사진의 이웃들이 바로 내 건물에 살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이미지 출처 9GAG)


지나가면서 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뿐더러 보통 낮에는 출입이 별로 없던 집 앞에 사람이 서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잘 지내냐고, 적응 잘 되느냐, 애들은 괜찮냐, 춥진 않냐, 연말 잘 보내라 등등의 말을 걸기 시작한다.


말이 짧으니 답할 말도 뻔한지라 계속 뚜또 베네 그라찌에 (Everything good, thank you) 라고 해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문 닫혀 밖에서 못들어가는 게 사실 다 좋은 상태인건 아니므로 에라 모르겠다 나도 대화나 해볼까 하고 아까 외워둔 문장을 큰 소리로 복창했다.


그러자 작은 지푸라기가 나타났다.

엘레베이터를 타려던 할아버지 한 명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내가 뭔가를 가져와서 도와주겠다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신다. 그리고는 자기 층 내려서 큰 소리로 집에 있는 가족에게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가 막 들린다. 아마도 일층 여자가 문 닫혀서 못 들어간대. 도와줘야 하니까 그거그거 어어 그거 갖고와봐- 이런 말이겠지.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윗 층을 휘젓는 사이 쓰레기 한아름 들고 나가던 앞집 아주머니와 그 아드님이 등장한다. 한번이 어렵지 두번이 어렵나 싶 문장 연습도 할겸 나는 또 사연 설명을 했고 두 사람은 볼일 보러 가던 걸 다 제끼고 창고로 내려가서 뭔가를 또 주섬주섬 꺼내온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앞집 아주머니랑 아들, 윗집 할아버지랑 그 윗집 할배까지 총 4명이 사이좋게 들고 온건 모두 엑스레이 필름지. 이거 집집마다 상비품이었구나. 하하하하하.


열쇠로 문을 잠근 건 아니지? 그냥 닫기만 한거야? 여분 열쇠는 있어? 등등의 기본 사항을 확인하며 4명, 추가로 지나가는 이웃 2-3명, 우리 가족 4명 등등 총 열댓명이  앞에서 엑스레이 필름지 갖고 씨름한 결과 10여분 후에 문이 달칵 열렸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모두 얼싸안고 쁨을 나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저리 가라는 감동적인 분위기. 정말정말 고맙다고 백 번 인사하고 모두가 흡족한 해피엔딩으로 헤어진 뒤 드는 생각은 두 가지다.


1. 문 정말 잘 잠그고 다녀야겠구나. 닫기만 해놓으면 엑스레이 필름으로 열리는 허접함이라니.  

2. 저 엑스레이 필름 어디서 구하지. 병원 앞 쓰레기통을 뒤져야 할까.



내가 용기내 말을 걸었더니 도움이 쏟아져 들어오는 따뜻한 곳에 살고 있다. 만약 이웃집 사람들이 안 도와줬으면 난 열쇠 수리공을 불렀을 거고 그 사람도 엑스레이 필름 들고 와서 열어주고는 100유로 출장비 받아갔을 거다. 말 한마디로 100유로 돈이 굳었다. 이탈리아어 더 열심히 배워야지.

작가의 이전글 [로마의 평일 7] 인내심을 시험하는 대중교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