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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May 05. 2017

정리

요즘 내 삶의 한 가지 목표는 "정리"이다. 공간 정리, 시간 정리, 인맥 정리 등등. 언제부턴가 복잡하게 엉켜버린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정리 관련 책들까지 읽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버리기 어려운 물건이 옷과 책이라고 한다. 무려, 1년이 넘게 손 댄적도 없으면서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필요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 막상 실행에 옮기려해도 "이 책 대학생되고 처음으로 샀던 책인데..." 등등의 감상에 젖기 시작하면서 결국 제자리라고 한다. '음음, 그래 이건 마치 내 이야기네?'하면서 한번 더 고민을 하다가 큰 마음을 먹고 책들까지 정리하고 있다.

한 번은 치우다가 인턴 수료증이 있길래 이런 명예 뿐인 물건 버려야지 하다가 한번 펼쳐보았다가 툭 떨어지는 백화점 상품권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무려 5만원 짜리라니... '역시 함부로 버려서는 안돼'라며 스스로 타협하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큰 마음을 먹기로 했다.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책들은 기부하기로 하고 도무지 꼭 한 번은 볼 것 같은 책들은 박스에 포장해두었다. 그랬더니 책장이 한결 가벼워지고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당의 집 이야기이다. 토요일에 잠깐 울산 집으로 내려갔더니 작은 책꽂이에 그간 사보았던 책들이 또 꽂혀 있었다. 한 권씩 꺼내어보니 책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플래그 포스트잇들. 책 제목들을 훑어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책은 "클림트"의 책. 미술과는 거리가 멀기에 단순 호기심으로 샀을리는 없고 아마 철학산책이나 서양미술사 때 읽었던 책인 것 같다. 클림트의 "키스"는 잊을 수가 없는데 철학산책 기말고사 때 이 그림을 보고 ~~~하게 해석하라는 문제가 나왔었다. 당시 그것이 아주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도 몰랐던 나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을 시험문제로 펼치는 교수님에 대한 음모론을 답으로 냈었다. 다행히 철학 수업이기에 생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아서 "키스"는 나에게 좋은 감정으로 남아있다.

그림들을 찾아보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가본 어느 봄의 국회도서관. 그 곳에서 부랴부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 날 몇 시간의 일.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썼던 다이어리 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매일매일 하루를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일기를 쓰진 못해도 "정원" "하얀날"처럼 단어라도 기록하려고 했다. 책을 읽었으면 책의 제목을 썼고, 그 날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라도 써서 빈 칸을 두려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기억할 수 있도록. 더 의미가 있도록 하루하루를 보내야 겠다는 습관이었다. 다이어리 마지막에는 혼자 여행갔다가 꽂아두었던 메타스퀘이어나무 잎도 꽂혀 있었다.

요즘과는 사뭇달라서 가벼운 웃음이 났다. 요즘은 바로 그저께, 일주일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간다는 것만 느낄 뿐 오늘 하루가 어제 혹은 내일보다 아주 특별하다는 느낌은 줄어들었다. 나중에 내가 올해를 돌아볼 일이 있을 때 나는 어떤 하루를 추억할 수 있을까. 핸드폰을 잃어버린 뒤 일년의 기록이 날아간 뒤로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까지 잃어버렸다. 공간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개려면 다시 단어로라도 기록해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일침은 책이나 추억거리를 절대로 친정 집에 쌓아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 그렇지만 울산 내 방의 책들까지 다 정리하기는 너무 어려울 것 같다. 기억과 추억들이 있기에 현재의 나도 있는 것이니까 비밀공간 하나는 남겨두고 싶다는 게 정리 미숙인의 최후 변론. 조금씩 천천히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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