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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May 05. 2017

우리는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지

30분 남짓 되었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무섭고, 두려웠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에는 정신이 혼미했고 나중에는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혼자 일기라도 쓰고 싶어 학아재에 갔다아홉 살 무렵의 트라우마가 생각났다친구와 동네 주간지를 가지고 신문배달 놀이를 하였고어떤 나이트클럽에 신문을 놓고 올라오는 길에 어떤 남자로부터 복부와 그 뒤로 생각나지 않지만 폭행을 당했다그렇게 맞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나는 너무 어렸다기억 나는 건그 남자가 여기 불 지르러 온 거냐고 계속 채근하면서윽박질렀고 모욕을 주었던 기억이다.


사람들은 빙 둘러서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나는 계속 아니라고 했지만그 상황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고 극도의 공포 속에서 울기만 했다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그 날 색종이로 여우를 만들었던 기억만 또렷이 남아있다그리고 나는 그 날 여우 접기를 한 사실만 일기장에 적었다그 후로 나는 집 앞의 그곳을 빙 둘러서 돌아갔다몇 개월이었는지일 년이 넘는 시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그 당시 나는 무척이나 두려웠고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무렵 겪었던 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내 모습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울 수 밖에 없었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무력감이 들었다.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무너져야 하는 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동안 그 무렵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래도 도망가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구경만 하고 구해주지 않던 주변의 사람들이 아닌 친구와 가족들이 그래도 나의 편이 되어 주어 함께 고민해주고 아파해줬다. 시간이 가면 이것도 결국은 지나가고 잘될 것이라는 경험을 쌓아왔고, 결국 사람의 진심은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씩 용서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아홉살 무렵의 그 남자 역시 그 작은 신문 쪼가리에 반응할 만큼 불행한 남자였을 지 모른다. 가게와 재산도, 그 외 다른 것들도 모두 그렇게 불태워 버렸는 지도 모르지. 나는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극도로 예민한 그 트라우마를 아주 운이 안 좋게 건드렸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남들은 별 것아니라 생각하지만, 건드리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부분들이 있다.


'아이야,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고, 아주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그 때도 들었다면 내 삶도 성격도 많이 바뀌었을까?


 존경하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젊은 니가 큰 경험을 하는구나. 우리는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지. 어쩌겠나. 다음 주에 따뜻한 차 한잔 하자꾸나.’ 조금 더 깊어져 가기를… 허나 그 깊음 뒤에 꼭  아침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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