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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Oct 10. 2017

매월 둘째 주 월요일 9시에 재즈 연주를 하는 남자

연휴의 마지막 날, 산책도 하고 책도 읽을 요량으로 책방도 들를 겸 망원역에 갔다 왔다. 저녁도 든든히 먹고 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좀 걷고자 망원역에서 상수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합정역을 바로 조금 지나는 골목에 재즈가 흘러 나왔는데, 여자친구가 나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고 해서 지금 가기로 결정했다. 지하로 내려가니 이미 연주를 하고 있었고, 입장료 15,000원을 내면 음료를 함께 내어준다고 했다.


청중은 우리 포함해서 모두 5명이었는데, 외국인 할아버지 한 분하고, 한국인 남자 2명이 각각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고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옆에 있으니,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두운 분위기, 재즈 때문인지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나는 재즈의 ㅈ도 모르지만, 모르는 채로 손짓, 고갯짓을 자연스럽게 해가며 음악을 보았다.


어느 날 소공연장에서 우연히 글렌체크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그 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드러머의 표정과 손짓이었다. 정말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정말 이게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라는 듯 드럼을 두드리는 모습에 나도 같이 매혹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어쩌다 공연을 보러 갈 기회가 생기면 듣는 재미도 있지만, 보는 재미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공연은 더 그랬는데 색소폰, 피아노, 기타, 드럼의 각각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에 취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연주하는 모습이 황홀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특히 색소폰은 정말 섹시해서 색소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이어폰만 들을 때는 귀만 때려대는 느낌이었는데, 각각의 악기가 온 몸을 쿵쿵쿵쿵 두들겨대는 그 느낌도 너무 좋았다.

 


앞의 2팀의 공연은 모두 보컬이 없는 공연이었다. 정확한 정의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속의 언어 사전에서 반주는 보컬을 빛나게 해주기 위해 멜로디를 연주하는 느낌인데, 연주는 연주자들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무대 같은 느낌이다. 그림의 목적이 사진같은 정밀함이 아니듯, 멜로디를 그대로 찍어내기 보다는 각자의 감정과 느낌을 최대한 악기로 표현하려는 연주자들이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다. '가사도 없이 반주만 듣는 사람들은 뭐지?'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내가 찾아서 들을 때가 많다. 따로 잘 아는 음악가나 음악은 없지만, 유튜브나 지니 어플 등을 통해 그 날의 기분을 검색하여 뉴에이지 같은 음악을 들을 때가 많아 졌다.


노랫말을 듣는다는 건 그 음악을 만들거나 부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들을 때는 그런 강요가 없는 것 같아서 편하게 느껴진다. 지금 내 머리 속도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서, 쉬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반은 멍을 때린 상태로 흘러 나오는 멜로디에 생각을 흘려 보내는 편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메시지가 없어서 오히려 나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고 더 자유로운 기분이다.


두 번째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공연의 시작 시간이 대략 8시 30분 쯤이었다. 내일 (마음의)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해서, 이제 그만 가야되나 싶었는데 마침 얼마 없던 관중들이 다 빠져 나갔다. 기타를 멘 분이 앞으로 와서 튜닝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친구와 나는 잠시 갈등에 빠졌다.



'우리도 나가면 저 아저씨는 관중도 없이 공연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관중이 없어도 공연을 하나?'

어느덧 기타를 멘 아저씨와 우리는 서로 꺼내 놓거나 공유하지 않았지만, 묘한 친밀감과 의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까지 남기로 했다. 아저씨가 튜닝을 하는 동안 핸드폰으로 웃긴 글을 검색하며 떠들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날의 마지막 공연은 그 아저씨 한 분이 솔로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미안함과 숙연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내려두고, 음악을 드는 것에 집중했다.

첫 번째 연주가 끝나고, 연주를 했던 음악을 소개해주고 본인은 매월 둘째 주 월요일에 공연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그 말씀을 하셨는데, 연주를 듣는 내내 그 말이 맴돌았다. 매 월. 둘째 주에. 월요일에. 공연을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오늘은 연휴이고, 재즈의 ㅈ도 모르는 우리만 마지막에 남았는데 월요일 이 시간대면 무관중일 때도 많지 않을까. 매주 월요일 이 시간에 재즈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상념들과 내일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 거리들을 생각하며 한 시간이 지났다. 아주 기억에 남을만큼 좋았다거나 인상깊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캔 맥주를 두 캔 정도 마신 느낌. 취한 것도 아니고 안 취한 것도 아닌 그런 묘한 느낌이 났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잘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났고, 여자친구는 방금 들었던 음악의 이름을 묻고는 함께 나왔다.



상수역으로 걸어가는 길이 묘했다. 열흘 간의 단 연휴가 끝나고 나서의 홍대 거리. 금요일, 토요일 밤의 홍대 거리보다 훨씬 쓸쓸하고 슬퍼보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평소 일요일 밤의 홍대 거리보다 슬픈 느낌은 아니었다.


상수역에서 6호선을 타고, 한강진 역에서 광역버스를 갈아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젠장. 가방에 지갑이 없다. 바로 카페에 연락을 했지만 마지막 공연이라 알바생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있다고 했고, 사장님께서는 새벽 1시까지 연습을 하고 새벽 2시에 돌아와서 찾아봐 주시기로 했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그대로 여기에 남을 지 우선은 집에 갔다가 혹여라도 찾으면 새벽이라도 쏘카를 타고서 찾으러 올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만 있다가 바로 나왔기 때문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여나 못 찾을 때의 리스크를 대비하여 우선은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온갖 스트레스가 몰려 왔다. '니가 또 지갑을... 이런 칠칠 맞은 등신같은...'  너무 늦은 시간에 이 무슨 민폐인가 싶다가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다른 팀원의 법인카드도 내 지갑에 있었다) 일단은 2시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세 번 고민을 하고 다이얼을 눌렀는데, '핸드폰이 꺼져 있습니다... 음성 사ㅅ..."


안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잠이 더 깨버렸다. 온갖 추측을 해보다가, 결국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단 자기로 결정했지만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E-book도 켜보고 스포츠 기사도 읽고, 핸드폰 게임도 해보고 어떻게든 잠에 들려고 노력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3시 반이 넘어 아침에 연락드리겠다는 문자를 남겨 놓고 진짜 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답장이 왔다. 용기를 내어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다행히도 사장님이 아주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 주셨다. 사장님은 우리와 우리가 머물던 테이블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그런데 지갑은 없다고 했다. '어, 이게 아닌데...' 사장님은 구석구석 찾아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인도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오기도 한다고 위로를 해주셨다. 정말 이 새벽에 귀찮은 내색없이 너무 친절하게 위로를 해주셔서 감사하다가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이 너무 피곤해서 일단 못 가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라는 희망마저 와장창창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내일 아침에도 레슨이 있어서 한 번 더 찾아봐 주시기로 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온 세상이 절망스럽고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 더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결국 5시 반이 넘어서인가 2~3시간도 채 못 자고 부은 얼굴과 절망스러운 기분을 가슴에 품고 회사에 출근했다. 다행인지 나 말고도 절망스러운 기분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더 티가 나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lost112에 습득물을 계속 새로 고침하고,(이미 5월에도 분실물 신고 1건을 접수했었다...) 결국 잃어버렸을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보았다. 그리고 열심히 어젯 밤의 만약을 가정 해 보았다. 만약, 마지막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합정역에 가지 않았다면. 재즈 카페를 그냥 지나쳤다면. 잃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 황홀했던 기억들이 후회로 다 사그라들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어젯 밤의 일을 글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이거라도 안 남기면 정말 후회만 남을 거 같아서.(생각해보니 지갑 하나 잃어버리고 너무 호들갑인 것 같다.)


최후의 보루로 사장님께 오전에 전화하기로 했는데, 사장님이 연락을 안 받으신다. 찾으셨으면 바로 연락을 하셨을 것 같은데, 하아... 연휴 복귀 기념으로 점심에 팀에서 찜닭을 먹기로 했으나, 속도 안 좋고 겸사겸사 컴퓨터에 앉아 글을 적고 있다.


글을 적고 있는데, 사장님께 연락이 왔다. '한 번 더 찾아보았지만, 역시...'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찾았어요'. '와..................' 노르웨이 연어 같은 회귀 본능을 지닌 나의 지갑에 감복하면서, 이런 안일함 때문에 지금 몇 번이라고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너무 좋았어서, 꼭 한 번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했던 재즈카페는 바로 오늘, 퇴근하자마자 다시 방문할 생각이다. 재즈의 ㅈ도 모르는 나의 재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렇게 지극하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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