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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Mar 01. 2018

퇴사고민 2주차_회사 생활 반십년 강제 회고

  내 생애 첫 번째 유럽 여행의 첫 번째 도시는 포르투였다. 포르투에서의 첫날 밤은 어쩐지 스무살 때 처음 봤던 서울의 밤을 생각나게 했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설렘보다는 낯섬이 더 컸던 서울의 밤거리. 울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을 때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서울 아줌마가 떠올랐다. 아마, 동네 슈퍼 하나 정도는 운영하고 있을 법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 역시 동네를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듯 저벅저벅 나를 향해 걸어왔었다.


  “싸고 예쁜 아가씨들 많이 있어요, 놀다가요...” 그 동네 아주머니는 슈퍼 같은 곳에 갓 들어 왔을 딸들을 그렇게 흥정하고 있었다. 놀라서 조용히 아주머니 옆을 지나는데, 뒤를 돌아서도 다시 한 번 딸들을 흥정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딸들과 어머니는 돈을 아버지로 삼았나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서울역을 들어가는 기분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를 손으로 벌리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하도로 들어서자 과자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는 헤진 이불로 따뜻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신발도 몇 켤레 놓여 있었다. 소주병이 너저분하게 굴러 다녀, 그곳이 누군가의 하룻밤을 책임지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밤에 대한 첫 이미지였다. 어째서 서울의 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 지는 모르겠다. 오랜 만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혼자 있다는 기분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할 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그 때와 비슷해서 였던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둘째 날 아침부터 맞이하는 포르투는 내가 가 본 최고의 도시 중 하나였다. 포르투에는 서울과 달리 세계에서 가장 예쁜 기차역도 있었다. 여행은 아직 14박 15일이나 남아 있었다. 당분간은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돌아다니자고 생각했다. 포르투를 거쳐 여행 5일차에 리스본으로 넘어와 벨렘 지구라는 곳에 방문했다.



  여행을 와서는 매일 점심을 먹은 뒤에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 멍 때리거나,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때가 가장 좋았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오지 않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늘 전 날에 꼭 가야할 곳 몇 곳만 여행 책에서 체크를 하고 돌아다녔다. 벨렘지구에서 유명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구경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갔다. 포르투갈의 노을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어딘지는 모르지만 가파르게 나 있는 언덕길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언덕길이 힘들었기 때문인지 그 간의 회사 생활이 생각났다. 13년 1월에 입사를 하였고, 12월이었으니 거의 회사 생활을 한지 딱 반 십년이었다. “5년 간의 회사생활에서 무엇이 남았을까?” 돈은 아니었다. 특별히 빚을 지거나 낭비를 심하게 했다고는 생각은 안 했지만 열심히 저축을 하거나 재테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경력을 쌓았나?” 5년 간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HRD는 나름 회사에서 많이 배우고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시장에서 정말 실력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에는 아주 자신 있게 답변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남았나?” 우리 팀 동료들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번 여행도 팀 동료들이 많은 도움을 줘서 떠날 수 있었다. G와 D, H가 일정을 짜는 것을 내내 도와줬었다. 게다가 프로분실러인 나를 위해서 G는 생일선물 겸 분실방지 세트를 사다 주었고, D는 여행 떠나기 이틀 전 날에 USB를 빌려달라고 하더니 내가 가는 여행지들의 다큐들을 담아서 건네주었다. H, C와 같이 진행하던 승진, 평가 프로세스가 남아 있었지만 흔쾌히 다녀오라고 떠밀어준 덕분에 여행을 떠나올 수 있었다.


  팀장님도 2시간 뒤에 휴가를 승인해주었지만(너무 부러워서 잠깐 감상에 젖었다고 했다), 이렇게 장기간 휴가에 대한 승인이 없었더라면 떠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팀을 단순한 회사 동료들 이상의 관계라고 생각한다.(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팀원 레벨에서 회사라는 것은 사실 그 팀의 영역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팀에는 존경할 수 있는 팀장님이 있고 진정성을 가지고 일에 대해 언제든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 결심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는 장면들을 생각해보다가 너무 머리가 복잡해져서 일단 에그타르트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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