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11. 빛의 호위

by 이단단


오늘의 햇빛은 조용했다.정면에서 쏟아지지 않고, 책장 사이 한 칸을 통해 들어왔다. 밝았지만 눈부시지 않았고, 따뜻했지만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늘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가야 안심이 되고,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걷다가 멈추면, 세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 속 권은의 카메라 빛 처럼, 환하게.



햇빛은 앞에서 끌어주지 않았다. 대신 옆에 머물렀다.넘어지지 않게,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사이 책들은 그대로였다. 끝내지 못한 문장들도, 다시 펼치지 않을 페이지들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제자리에 있었다. 햇빛은 그것들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그 사이에 들어와 공간이 숨 쉬게 했다. 나는 모든 걸 바꾸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이 정도면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빛이 드나들 자리 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여백 하나.


걷다가 멈추면,나는 더 잘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에 있는 사람이 된다. 오늘의 햇빛은 그 상태를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더 읽지 않아도, 더 쓰지 않아도이 자리에 잠시 머물러도 괜찮다. 조용한 빛이 있다면, 나는 다시 걸을 수 있다.
그것으로 오늘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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