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라앉은 체리
겨울은 늘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 온다.그날도 그랬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두 개의 잔, 반쯤 비워진 접시, 끝까지 녹지 못한 얼음 몇 조각. 누가 먼저 계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자리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연인들은 늘 저 자리를 좋아했다. 서로의 무릎이 닿는 거리, 잔을 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겹치는 각도. 그들은 추위를 핑계로 더 가까워졌고, 겨울을 핑계로 더 오래 머물렀다.
가끔은 사랑이 아니라 온도 때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깥은 차가웠고, 실내는 적당히 따뜻했다. 헤어질 이유가 없을 때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떠나야 할 이유가 생기면, 그제야 계절을 탓한다.
그들이 나간 뒤에도 잔은 그대로였다.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한 잔에는 체리 하나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인들은 늘 그렇게 물건을 섞어둔다. 나중에 구분할 수 없도록.
나는 그 자리를 정리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끝을 대신 정리해주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떠난 사람의 온기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손으로 치우기엔 아직 따뜻했고, 마음으로 외면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었다.
겨울은 결국 모든 걸 비운다. 사람도, 말도, 약속도. 하지만 비워진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함께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간격, 말하지 않았던 표정, 끝내 남기지 못한 문장들.
나는 잔을 들지 않았다. 이 자리는 이미 누군가의 계절이었고, 나는 그 계절을 흉내 낼 생각이 없었다. 대신 잠시 서서, 그들이 앉아 있었을 법한 방향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걷다가 멈춰 문을 닫는 순간, 겨울이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