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2. 대오서점 앞에서.

by 이단단



대오서점 앞에 서면 시간은 더 이상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기와 아래 오래된 책등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버티고 있고, 유리창 너머의 공기는 누군가가 막 자리를 비운 것처럼 아직 따뜻하다. 이곳의 책들은 팔리기 위해 정렬된 것이 아니라 머물기 위해 쌓여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쉽게 손을 뻗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는다.

전구는 환하게 나를 부르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앞에 서 있는 나를 그대로 허락해 준다. 그래서인지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도시는 늘 다음을 묻지만 이 서점은 묻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정해야 하는지 같은 질문들을 이곳에서는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새 책은 없지만 버려지지 않은 시간들이 있다. 누군가의 청춘이었고 도피였고 희망이었던 문장들이 책 등 사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나는 오늘도 고르지 못한 채 오래 머문다. 한 권을 고른다는 건 지식을 사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한 시절을 조심스럽게 빌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여기서는 읽지 않아도 괜찮고,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 그래서 나는 대오서점 앞에서 늘 하던 속도를 내려놓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과 책들 사이를 오가며 이곳의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새로 산 소설집을 꺼내며 읽다가 설 몇 줄을 적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나를 그대로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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