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4. 중림동 헤매기

by 이단단


오늘은 계획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러 가려 했지만, 카페 문은 닫혀 있었고, 걷던 길은 눈 때문에 미끄러워 한참을 조심해야 했다. 가고 싶었던 카페에 앉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사진을 찍는 상상을 하고 왔는데,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미끄러운 길바닥, 가득찬 테이블,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오래동안 쌓아둔 대화를 나누려고 삼삼오오 모여든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덕분에 할 일을 잃어버린 카메라는 주머니에 담겨 점점 따끈해지고 있었다.


어디 앉아있을 곳이 없나 싶어 중림동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서대문, 충정로,서울역과 닿아있는 곳. 중림동이라는 곳이 궁금해져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약전중동'과 '한림동'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따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약전중동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장안에 약을 공급하는 '가운뎃말'이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림동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이정암 삼형제가 모두 이곳에 살면서 한림 벼슬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가운 바람에 볼이 얼고 있는 것도 모른채 동네의 매력에 빠졌다. 골목 사이마다 숨겨진 보물처럼 발견하곤 했던 작은 상점들, 고소한 커피향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창에 스며드는 겨울 햇살을 담뿍 받고 있는 카페가 보이고, 높은 경사로에 쌓여진 하얀 눈을 따라 걷다가 멈춰서다보면 고요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약현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성당을 더 성스럽게 만들어주는 자연들과 그곳으로 들어가는 예쁜 연인들의 얼굴이 눈보다 희게 빛났다.

맑은 햇살 위로 부유하듯 나리는 쌀알 같은 눈가루가 눈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구;에 낮게 울렸다. 종종걸음을 걷는 아기들의 걸음도 추적추적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는 어두운 표정의 노인도 모두가 골목마다 쌓인 흔적과 오래된 건물의 색감 속에서 오늘 하루의 작은 숨결을 틔웠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날도, 이렇게 눈과 귀, 마음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아니 하루하루 보내다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이 더 많다. 나는 비록 이 동네에 처음으로 떨어져 사진 한 장, 글 한 줄 없이 지나쳤지만,중림동의 공기 속에서 오늘 하루를 기록한다.


오늘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걸었다.

덕분에 매력적인 동네를 알게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