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01. 나의 흰머리를 사랑해야지

by 이단단

​휴일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은 언제나 나를 침대 밖으로 떠민다. 일할 때 로딩 없이 쭉 해내야 하니까 몸에 배어버린 ‘효율’의 감각은 쉼표조차 생산적으로 찍으라며 나를 채찍질할 때도 있다.시 책을 읽어도 카페로 나가곤 하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열이 나서 누워만 있다가, 독서모임도 나가지 못하고 밀린 빨래를 등진 채, 병원을 다녀와서는 침대라는 이름의 가장 작은 섬으로 도망쳤다.


​문득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집은 없어도 위스키와 담배만 있으면 존엄을 지킬 수 있다던 그녀. 미소는 가계부에서 가장 먼저 ‘약값’을 지워버렸다. 매일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약.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외형’ 대신, 차가운 위스키 한 잔이 주는 ‘내면의 평온’을 선택했다.


​나도 오늘 그녀를 따라 글렌피딕을 잔에 따르고 싶었지만 대신 유리잔에 보리차를 따랐다. 한낮의 햇살을 머금은 금빛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른다. 대충 보니 글렌피딕 색이라며 농담도 해본다.


차가운 물의 기온이 온몸으로 퍼질 때쯤 거울을 보았다. 아, 미소처럼 나에게도 흰머리가 돋아 있었다. 앞머리에 집중적으로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


그동안 소리 없는 전쟁이 내 머리카락 한 줄기를 은빛으로 탈색시킨 모양이다. 누군가는 써 노화가 오느냐고 묻겠지만 나는 '훈장’이라고 생각해 본다. 빨래는 못 했어도 위스키 향을 즐길 줄 알며, 내 영혼의 색은 누구보다 선명하다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채 한강 변 텐트 속에서 거울을 보며 웃던 미소처럼, 나도 오늘 침대 위에서 은빛 머리카락 한 올을 만지며 웃는다. 엄마가 마침 전화가 와서 염색 좀 하라며 잔소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됐어 아무도 내 머리 안 봐. 라고 해버렸다.

비효율적이지만 최대한 우아하게 하루를 보냈다.방금 또 열과 한바탕 싸웠으니 흰머리가 한가닥 더 늘어나려나. 나의 머리색이 다채로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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